마음을 울리던 순간들에 대해
장장 3개월을 읽던 <경애의 마음>을 다 읽었다. 다 읽고 나서 경애와 상수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오늘 글에 담으려다가, 그간 꾸준히 부분 부분 필사해오던 문단들을 소개하고 싶다. 이 소개를 보고, 글을 읽고 있는 당신들도 한 번쯤은 김금희 작가의 <경애의 마음>을 읽어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옮긴다.
사랑이 시작하는 과정은 우연하고 유형의 한계가 없고 불가해했는데, 사라지는 과정에서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알리바이가 그려지는 것이 슬펐다.
p.77
여름밤 사람들이 집어 들고나가는 아이스크림도 술을 마신 뒤에는 늘 달고 차가운 것을 사 먹던 산주의 표정을 떠올리게 했다. 경애는 산주가 그것을 차가워서 먹는 건지 달콤해서 먹는 건지 궁금했다. 언젠가 산주는 단지 빨리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라고 한 적이 있었다. 술을 마시고 난 뒤에 사람들과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그런다고.
p.89
경애는 그것이 꼭 E를 위한 일종의 애도처럼 느껴져서 여름의 한낮에 전철을 탔다.
"하기는 전철 끝이니까, 머니까."
"그쪽에서 보면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도 한 거잖아요."
p.182
아프면 고쳐가면서 쓰는 게 몸이라고 하는데 마음이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p192
시작도 진행도 종료도 모두 마음의 일이었는데 그 마음을 흐르게 한 동력은 자가발전이 아니었다는 것, 황망한 가운데에서도 오직 그것만은 분명했다.
p.193
안녕, 오늘도 무사한 아침이야.
무사하다는 것은 무한과 무수 사이에서 간신히 건져 올려진 낱말 같아. 막막한 바다를 떠다니는 작은 보트처럼.
p.199
상수가 그러면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면 그것의 이름은 뭐냐고 물었다. 경애가 그냥 피조물이에요,라고 하자 상수는 피조물의 정확한 뜻이 뭐더라 하면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존재 같은 거구나, 존재."
"존재랑은 좀 다르죠. 있다는 것과 있게 되었다는 것의 차이가 있으니까."
p.206
그만할까, 하는 말이 올라오기도 했다. 완전히 끝을 낼까.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하지만 그런 종결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산주를 죽은 사람처럼 만들고 상관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그건 적어도 스스로를 피조,라고 불렀던 어느 시절 누군가를 잃어본 사람에게는 가능하지 않았다.
p.226
언니, 폐기 안 해도 돼요.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서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강변북로를 혼자 달려 돌아올 수 있잖습니까. 건강하세요. 잘 먹고요. 고기도 좋지만 가끔은 채소를, 아니 그냥 잘 지내요. 그것이 우리의 최종 매뉴얼이에요.
p.275
"한국 사람들 왜 소주랑 맥주 섞어 마시는 거예요?"
"빨리 취하려고."
오토바이를 몰던 에일린이 고개를 뒤로 젖혀가며 크게 웃었다.
"그건 정말 웃기잖아요. 빨리 취해서 뭐하려고 빨리들 취해요?"
"빨리 취해서 집에 가려고 그러지."
p.286
어쩌면 손상된 것이 아닐까. 제대로 봉인되어 있던 것을 뜯어서 엉망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나는 그런 의문이 들면 그날 내가 카페로 나가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해. 우산은 있어? 하고 묻지 않고 옷은 왜 그렇게 입었어?라고 걱정하지 않고 너랑 자고 싶어 다시 따뜻하게, 라는 선배 말을 믿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해. 잘 지내고 있어? 불행하지는 않아? 혹은 그 불행이 잘 되어가고 있어? 완전히, 후회 없이, 제대로 불행해하고 있어? 이렇게 물었어야 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런 말들을 늘어놓다가도 정작 산주에게는 전할 수 없으니까 불행을 털실처럼 잘 말아서 이 빈 공간에 덩그러니 놓아둘 수밖에 없었다.
p.287
그러면 경애는 그 순간, "원두막이 무너진 거야. 우리는 그 와중에도 그게 웃겨서 다친 줄도 모르고 웃고"라고 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다친 줄도 모르고 웃는다'는 그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는 경애가 커가면서 엄마에게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되었다. 하지만 막상 경애가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되었을대는 다친 줄도 모르고 웃을 수는 없었다.
p.298
여름이면 시간은 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스크림처럼 녹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런 날들을 보내고 나면 한 살 한 살 들어차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이 그저 닳아 없어지기만 할 것 같았다.
p.338
"한 블록도 사람 살다 보면 한 블록이 아닐 수 있는 거예요. 일어나서 문밖으로 나오는 일이 무동력 에베레스트 등반 못지않게 힘든 일일 수가 있고요."
p.379
"그래서 그놈, 아니, 그 사람에 관한 마음은 어때요?"
"그냥 있죠. 어떤 시간은 가는 게 아니라 녹는 것이라서 폐기가 안 되는 것이니까요, 마음은"
p.386
"그럴지도 몰라.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그걸 짜내는 것처럼 동작을 하며 울고 있었어."
"그래서 같이 울었냐?"
"너한테 내가 그런 이미지니?"
"어."
"아니, 난 그때 밥을 먹고 있어서 그냥 밥을 계속 먹었지. 여자가 자꾸 우는 거랑 내가 그렇게 열심히 밥 먹는 거랑 그리 다르지 않게 느껴졌어."
"그래, 안 다르지."
p.392
막 개화하려는 목련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그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꿈처럼 느껴졌다. 경애는 산주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애를 본 산주는 한동안 아무 말하지 않다가 평소처럼 팔을 들어서 나야,라고 했다.
"오늘은 불이 켜져 있어서 기다려봤어."
p.407
요즘 저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그걸 했던 나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합니다. 그 시간의 의미가 타인에 의해서 판결되는 것이야말로 나 자신에게 가혹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경애의 마음>은 여러 사람의 이별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작 중에 나오는 상수, 경애 둘 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조 선생, 에일린, 산주, 은총과 '언죄다'페이지의 회원들 모두의 이별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이 직접 다가오는 책이다. 사랑하고 있거나 사랑한 적 있는 모든 당신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나는 읽는 내내 경애가 되기도, 산주가 되기도, 상수가 되기도- 그리고 누군가의 추억 속 첫사랑이 되기도 하였으니까. 비 오는 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마음이 바닥날 때까지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20200826
경애의 마음을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