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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Aug 27. 2020

나 연애해, 그렇게 됐다.

연애는 마라톤처럼.

"나 연애해. 그렇게 됐다."


 오랜만에 연락한 현은 전화하는 내내 뭔가 달뜬 목소리였다. 현은 이상하고 독특한 우연과 인연으로 만나게 된 친구인데 생각보다 서로 합이 잘 맞아서 몇 번은 만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커피를 마시고 함께 담배를 피웠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있는 시간 속에서도 둘이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꽤 있었던 것은 함께 담배를 피우던 시간 덕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여태까지의 내가 봐 왔던 현은 굉장히 진중한 사람이라서 자신의 이야기도 타인의 이야기도 쉽게 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 단어를 고르고, 상대의 기분을 배려하는 사람. 요즘처럼 말도 빠르고 사람도 빠른 세상에 천천히 이야기하는 현을 보고 있자면 가끔 목젖을 치고 싶은 기분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의 신중하고 느긋한 모습이 불쾌했던 적은 없다. 그러나 답답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은 종종 있었는데 그게 바로 현의 연애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현은 지나치게 신중해서 기회를 코앞에 두고도 놓쳤다. 지금쯤은 용기를 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순간에 현은 항상 이게 내가 용기 내도 되는 상황일까? 를 과장 조금 보태어 오십 번은 고민했다. 물론 마음은 보이지 않고 언제나 상대와 내가 같지 않으니 신중해야 하는 것도 맞지만 평생 신중하기만 하다가는 코앞의 사랑도 놓치고 마는 것이 인연이니까.


 현은 자신의 근황을 전하며 내 근황도 물어왔다. 너는 어떻게 지내? 잘 지내? 나는 고민하다가 그저 그래. 하고 대답했다. 이 말의 연속이 마치 초등학교 일 학년 때 배우는 하우 알 유? 아임 파인 땡큐, 앤유? 같은 느낌이라서 속으로 조금 웃었다. 그저 그렇다는 말 뒤로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실을 적당히 말해주고 현의 연애에 대해 물었다. 현은 파하하! 하고 크게 웃더니 너는 여전히 뜬금없이 물어보네. 하고 말을 이었다.

 지금 만나는 친구는 굉장히 발랄한 사람이라고. 순수하고 소중한 사람이라고. 취향이나 흥미가 자기랑 전혀 다른 친구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고. 현의 말에 조금 고민하다가 되물었다.  


근데, 취향이나 흥미가 다르면 정 반대라는 거야?


현은 수화기 너머에서 흠. 하고 또 신중을 기하더니 길게 대답해주었다.


나는 취향이나, 본인의 흥미가 뭔지 뚜렷한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이 친구는 아직 그런 걸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더라고. 근데. 그럴 수는 있다고 생각해. 그냥 내가 취미가 뭐야? 물으면 자기는 취미가 없다고 이야기했었는데 그게 마음에 툭 걸려서.


 현은 말은 이래도 지금 만나는 친구를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정말로 그래 보였다. 현의 이야기에는 애정이 담겨있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를 사랑스러운 사람이구나 하고 확신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래 그렇구나, 연애하는구나. 하고 되새겼다. 연애를 끝낸 지 육 개월이 되어 가지만 나는 아직도 연애할 생각이 없다고 현에게 전하자 현은 그럴 수 있지. 근데 왜? 하고 되물었다.


글쎄. 이건 그냥 내 경험에서 나오는 생각인데, 안 좋은 사람을 만난 다음에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날 확률은 너무 낮더라고. 일단 내 깎인 마음을 다 회복하지 못한 채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고 하면 직전에 했던 연애와 비교해서 누굴 만나게 되는데, 그렇게 만나게 되면 새로 만난 사람이 전 연애보다 나은 사람일 수는 있어도 아주 아주 좋은 사람이 될 확률은 없는 거 같아. 내 기준이 너무 낮아진 상태인 거잖아. 전 연애했던 사람 같은 사람만 아니면 되는 걸로. 근데 세상에는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 너무 많고 나는 아직 굉장히 어리거든. 괜히 낮아진 기준을 대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가며 내 시간을 허비하고 상처 받고 싶지 않아서. 나는 행복하고 싶지 상처 받고 싶지는 않으니까. 적어도 연애하면서는.


내 대답에 현도 공감했지만 또 되물었다.


그런데 그럼 계속 나쁜 사람만 만나는 거 아니야? 조금 더 나은 사람. 그러니까 그냥 어디 하나만 괜찮은 사람을 자꾸 만나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그러지 않게 내가 나를 좀 더 사랑해야지. 누가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라고, 기다리고, 매달리지 말고.


현은 그제야 그렇네. 하고 동의했다. 내가 너의 새 연애는 순탄히 잘 흘러가고 있느냐고 묻자 현은 약간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기에 좋은 신호는 아니네- 하고 웃었다. 현은 조금 뜸을 들이다가 이야기했다.


내가 이 애를 좋아하는 만큼, 얘가 나를 좋아하는지 그걸 잘 모르겠어.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연애를 하면서 가장 많이 부딪히는 문제 중 하나. 상대가 내가 좋아하는 만큼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일. 마음의 크기가 달라서 생기는 문제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데?


다른 게 아니라, 그냥 이 애가 내가 하는 행동들을 부담스러워할까 봐 걱정이 돼.


 마음의 크기가 다른 연애. 그것은 비단 마음을 퍼주는 쪽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을 받는 사람의 문제이기도 하다. 연애는 두 사람이 같이 하는 거니까.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이야기했다.


현아. 나는 사실 연애를 쉰 적이 없거든?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연애했었거든. 고등학교 때는 그냥 나 좋다는 사람이랑 다 만났었어.


현은 작게 웃으면서 응, 하고 대답했다.


물론 고등학교 때 연애, 진지하게 생각 안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순간들이 다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됐고 그래서 내가 연애를 어떻게 해야겠구나, 나를 어떻게 생각해야겠구나 하는 기준이 생겼다고 생각해.


그렇지, 응. 맞아. 현은 다시 맞장구쳤다.


근데 이제야 긴 연애를 두 번 마치고 생각하는 거지만 연애는 마라톤 같아. 10킬로, 5킬로짜리 말고 진짜 42.195킬로미터를 함께 달리는 마라톤. 마라톤 경기에는 마라토너 옆에 같이 달리는 페이스메이커가 있단 말이야.


페이스메이커?


응. 마라토너가 달리면서 쉽게 지치지 않게 옆에서 함께 뛰어주고 그 사람의 페이스를 조절해주는 사람. 근데 심장박동을 조절해주는 기계의 이름도 페이스메이커야. 일정한 박동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심장에 페이스메이커를 다는 사람들도 있어. 그만큼 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지속적인 무언가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거라는 거겠지? 나는 앞으로의 연애는 그렇게 할 거야. 페이스메이커와 마라토너 같은 연애. 심장과 페이스메이커 같은 연애. 서로에게 그럴 수 있게. 누가 앞서고, 앞선 사람을 따라잡기 위해서 뛰고 일방적으로 끌고 가거나 끌려다니지 않는 연애.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현의 표정을 잠시 상상해보았는데, 안 본지가 조금 오래여서 그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는 사실 가늠이 잘 되진 않았다.


그간의 연애에서 나는.. 페이스메이커도 뭣도 아니었어. 그냥 누워있는 사람을 질질 끌고 가거나, 나보다 저만치 앞서 간 사람을 따라가거나. 근데 그런 건 내가 행복한 연애가 아니었던 거 같아서. 그냥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그러니까 너도. 혼자 가다가 지쳐서 주저앉지 않을 수 있게 연애해봐. 너도 그 친구도 지치지 않게.


머쓱하게 웃으면서 말을 마치자 현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맞아. 지치지 않게.


 현과 통화는 머쓱하게 몇 번 더 잘 살아라 잘 지내라 하다가 마쳤다. 요즘 같은 세상에 언제 밥이나 한번 먹자고 이야기하기도 머쓱해서 나중에 기회 되면 화상통화라도 하자고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현은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일하는 데도 한번 놀러 갈게. 하고 이야기했다.


 현과의 통화를 끝마치고 생각했다. 날 좀 좋아해 달라고 이야기하던 어떤 날들의 나를. 그리고 그 순간의 나를 떠올리며 불쌍해하려다가, 말았다. 나는 서툴렀다. 그것은 비단 나의 잘못 뿐만은 아니고 나와 연애한 모든 이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끝없는 자기 연민보다는 내일의 내가 무엇을 먹을지를 더 고민하고,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사랑할 것을 다짐했다.

 나 좀 좋아해 줘- 대신 좋아해 하는 말에 나도 좋아해. 가 오는 연애. 그리고 내가 첫 번째인 연애. 누구에게나 일 순위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내가 일등인 연애를 다짐했다.


2020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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