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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Nov 07. 2020

H의 속사정

육회, 스파클링 와인, 그리고..

 사랑이라는 게 항상 이상하다. 나는 지금 연애를 하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받는 쪽은 아무렇지 않고 주는 쪽은 반드시 언젠가 상처를 받는다는 점이 그렇다. 영원하리라 믿지 않으면서도 영원하기를 바라고. 순간에 상냥과 친절 때문에 이루어진다는 점도. 그리고 한 번 좋아한다, 사랑한다 말을 뱉으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번져가는 점도. 감정은 언제나 눈덩이 같아서 꺼내어 굴릴수록 점점 커지는 거지. 얼마나 커졌는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까지.


 H는 지독한 사랑에 걸렸다. 사랑에 걸렸다는 말이 이상하지만.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H는 얼굴에 이런저런 기분들이 티가 많이 나는 사람이다. 좋을 때, 싫을 때의 구분이 명확하고 그래서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금방 얼굴이 구겨진다. 물론 일하는 동안은 누구보다 프로페셔널한 자세로 서비스 얼굴을 보여주지만. H의 연인이 얼마나 그에게 못되게 굴었는지는 굳이 자세히 서술하지 않겠다. 문제는 우리가 다 알듯이 H가 정말 다양한 못된 짓, 말을 겪고도 그를 잊지 못한다는 점이다.


 H의 답답한 마음을 빌미 삼아 동네 술집에서 만났다. 실은 내가 술을 먹고 싶은 날이었지만. H는 평소와 똑같은 표정이었는데, 담담하게 이제 정말 끝났다. 고 이야기했다. 내가 뭐가 끝났느냐고,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을 때 H는


그냥. 이제 진짜 정말로 다 끝났어.


하고 대답했다. 두 번 묻지 않아도 애매하게 걸쳐져 있던 둘의 관계가 정리되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고 나도 더 묻지 않고 술을 따랐다. H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 한숨을 또 쉬었다.


진짜 병신 같은 거 아는데, 근데 이래도 못 놓겠어.


그런 마음을 내가 또 모를 리가 없지. 나는 고개만 끄덕이며 반쯤 빈 H의 잔을 채워줬다. 내가 여섯 달 전쯤 지독하게 마음의 풍파를 겪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나도 똑같았다. 놓을 수가 없어서 매일을 울고 지독하게 굴고, 별의별 짓을 다 해봐도 그가 나를 미워하게 되는 것 외에는 완벽하게 이별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밤을 새웠다. H는 다시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


다른 사람들도 다 나한테 바보 같다고 그래. 어떻게 아직까지도 그러고 있냐고. 근데 마음이 내 생각처럼 잘 안 되는 걸 어떡해.


그렇지. 우리는 항상 연애를 마칠 즈음, 어떤 관계든 정리할 즈음에 이상한 질문에 부딪힌다. 마음의 질문. 내 마음도 종이처럼 접어서 고이 넣어둘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에 서랍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있잖아. 근데 나는 너 병신 같진 않아.


H는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되물었다.


그냥. 마음에도 속도가 있는 거지. 그리고 그건 사람들마다 다 달라서 네가 느리다고 병신 같다고 하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해. 오 키로 마라톤을 뛴다고 생각해봐. 처음부터 끝까지 전속력으로 달려서 주파하는 사람이 있고, 은근하게 천천히 자기 페이스대로 뛰는 사람이 있고, 마지막까지 그저 설렁설렁 걷는 사람도 있겠지.


우리는 손을 뻗어서 잔을 부딪혔다. 세 번째인지, 네 번째인지. 술이 약한 우리로써는 그냥 마신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던 거 같다.


근데 그렇게 뛰는 사람들 중에 결국 결승선에 도착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어. 적어도 결승선이 목표면 다 결승선에는 도착하잖아. 등수가 중요하지 않고, 도착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더라도. 그니까 좀 느리고 더디고 같은 걸 반복한다고 해서 잘못된 건 아니라는 거잖아.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냥.


 H는 그러게. 네 말이 맞다. 이야기하고는 연거푸 술만 홀짝였다. H의 기분이 풀렸는지는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왜냐면 나도 슬쩍슬쩍 취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육회가 맛있었고, 같이 먹는 소고기 라면도 맛있었으니. 뭐가 어찌 됐든 우리 술자리는 맛있었다.



 H의 연애 이야기는 너무 사적인 술자리의 이야기여서 자세하게 적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줄곧 그런 말을 했다. 내가 얼마나 후회했으며, 앞으로 얼마나 후회할 것이며, 누구를 좋아하게 되리라는 말들. 나는 약간 몽롱해져 가는 정신 속에서 생각했다. 그래. 앞으로 누구를 좋아하게 되든, 어떤 관계를 시작하게 되든 후회하는 순간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은 그 후회에 익숙해지는 일뿐이다. 후회하는 순간에 익숙해지고, 다음에는 후회하지 말아야지 하고 또 후회하는 일. 문장만 보면 부정적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것들도 삶의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일 테니까.

 그냥. 우리 너무 같은 일로 다섯 번 이상 후회하진 말자. 두 번 다시 후회하지 말자!라고 하기에 내 후회는 이미 두 번을 넘었고, 상한선을 낮게 잡아두면 자기 연민의 동굴로 굴러들어가는 원인이 될 것 같으니까. 다섯 번 이상 후회하지 말자.


 일곱 시쯤 시작한 술자리는 12시가 넘어서 끝났다. 나와 방향이 다른 H는 역 근처에서 담배를 하나 피우고 헤어지기로 했고,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한 나는 거진 서서 조는 행색이었다. 중간에 둘 다 눈물을 훔친 탓에 얼굴은 얼룩덜룩했지만 마음은 괜찮아졌다.


 오늘이 지나고 아주 많은 시간들이 흐르고 나면 얼룩덜룩했던 마음도 언제가 괜찮아지기를 바라면서 H와 술자리를 끝냈다.


 집에 가는 길에 무거워지는 머리를 견디지 못하고 잠에 들었는데, 이상한 꿈을 꿨다. 아주 먼 곳에서 낯선 누군가를 만나는 꿈. 누굴 만났었는 지 기억나지 않는데도 마음 한 구석이 아렸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며 일어났을 때는 종점에 도착한 버스 정류장에서 택시를 잡아야만 했지만.

 집에 가는 길 H에게 전화를 걸어 잘 들어갔냐고 물었고, 잘 들어갔으니 걱정 말고 내 몸이나 잘 챙겨 들어가라고 했다. 퉁명스럽고 수다스러운 모임. 괜히 웃으면서 알겠다고 이야기했다. 다음엔 어디 갈까? 너 먹고 싶은 데로 가자. 날짜도 명확하지 않은 다음의 술 약속을 기원하면서.


20201107

H의 속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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