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과 오랜만의 긴 통화에서
윤은 오래 알고 지낸 동생이다. 특이하게도 고등학교 동아리 생활에서 만나 띄엄띄엄 연락을 하며 지냈다. 윤은 몇 안 되는 내 글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중 하나여서, 언제나 고맙고 기특해서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 중 하나다. 아직까지도 윤은 내 전화번호부에 ‘00부 윤’ 이렇게 저장되어있는데 투박하고 어리게 저장된 그 이름을 보면 괜히 웃음이 푸흐흐 하고 터진다.
윤은 2년이 넘게 꾸준히 만나는 남자 친구가 있다. 둘은 동화처럼 만나서 어느 커플들보다 잘 지내고 있지만 종종 윤은 자신의 답답함을 내게 우다다 털어놓곤 한다. 나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가 대답해주고, 윤은 다시 우다다 이야기를 하고. 우리의 짧고 몇 없는 통화들은 윤의 고민과 나의 대답이 주를 이룬다. 윤은 오늘도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는 큰 소리로 전화를 받고 싶지 않기에 ‘내가 좀 후에 전화할게’ 하고 이야기했다. 윤은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다가 알겠어요, 하고 전화를 끊었다.
역에서 내려 윤에게 전화를 걸던 중 종일 아무 생각 없이 밟고 지나다니던 바닥이 유독 축축하다고 느꼈다. 오늘 날이 포근한 탓이다. 미세먼지가 ‘나쁨’이라는 말은 어느새 오늘 날씨가 포근하다는 의미로도 와 닿는 시기가 되어 버렸다는 생각에 늘어지는 통화음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윤은 역시나 자신이 여태껏 남자 친구와 다툰 이야기를 했다. 누구는 말을 하지 않았고, 누구는 너무 말을 많이 한 탓에 둘은 다퉜다. 별 것 아닌 연인 사이에 흔히 있을 수 있는 문제였지만 대화가 부족했고- 그건 둘이 가지고 있는 장거리 연애의 특징이기도 했다. 장거리도 장거리 나름이지만 윤과 남자 친구는 지구 반대편의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으니 언젠가는 생길 수밖에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윤은 볼멘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이야기했다.
- 언니 근데 나는, 오빠가 이해가 가면서 이해가 안 가요. 왜? 왜 그럴까? 그냥 바로 말해주면 좋을 텐데. 왜 설명을 안 할까? 나는 많은 설명이 필요한 게 아닌데.
나는 가만히 들었고, 윤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그렇잖아요. 나는 많은 게 궁금했던 게 아닌데. 그런데 내 주변 남자인 친구들이나, 내 친구들한테 물어보면 다들 ‘남자들은 대개 그렇다.’ 고 해요. 그런 말을 들으니까 이게 정말 성향 차이인가 싶고요. 언니. 나는 이렇게 싸우고 나니까 마음이 너무 불안해요. 내가 뭘 바라는 지도 잘 모르겠어요.
윤이 말을 마치고 짧은 정적 사이에 내가 ‘그런데 윤아’ 하고 말을 시작했다.
“윤아. 나는 다른 건 잘 모르겠어. 그래 성향 차이일 수도 있고, 사실 그 사람이 너 없이 살아온 시간이 있고 너도 그 사람 없이 살아온 시간이 있으니까. 서로가 아무리 특별한 사이라고 해도 잘 모르겠는 부분이 있을 수는 있지. 그런데.. 사실 나는 연인 사이는 그냥 남이라고 생각해. 문서도 없고 맹약도 없잖아. 그냥 서로가 같은 마음을 공유하고 있고 ‘나 너를 좋아해.’하는 말로 시작되는 거잖아.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사이. 특별하지만 남인 사이.”
발 밑에 물이 고인 웅덩이를 괜히 한 번 찰박였다. 웅덩이에 비친 달그림자가 일렁이는 걸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남이니까. 잘 모르니까. 특별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그걸 확인하고..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약속한 사이잖아.”
윤은 짧게 ‘네 그렇죠.’ 하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더 필요한 게 뭘까.. 나는 배려와 이해라고 생각해. 그럴 수 있다, 그럴 수도 있다. 근데 이 좋은 말이 포기가 되지 않으려면, 대화가 필요해.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하고. 그러고 나면 진심에서 우러나서 그럴 수도 있다. 이 말이 좋게 나오는 거지.”
윤은 잠깐 생각하는 것 같더니
- 맞아요. 근데 오빠는 원래, 말을 잘 안 하는 사람이라서. 그래서 더 이 상황이 답답한 거 같아요. 둘이 만나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때는 지겨울 정도로 떠들어대는 사람인데. 지금은 전화도 잘 못하고, 연락도 잘 못하니까. 그래서 더 답답해요 언니. 저 진짜 이런 게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종종 윤과의 대화에서 나를 보는데, 오늘이 특히 그랬다. 내 지난 연애들이 떠올랐다. 나의 지난 연애들은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만났었는데. 여담이지만 윤과 남자 친구도 나이 차이가 꽤 나기 때문에. 오늘의 대화에서도 과거의 내 생각이 났다. 나는 숨을 몇 번 고르고 다시 윤에게 이야기했다.
“윤아.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아. 원래 그런 사람은 없어. 원래 말이 없고, 원래 불같고, 원래 이런 사람이고. 모든 행동과 이야기에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오빠가 지금 상황에 너한테 많은 말을 하지 않는 건, 그냥이나 원래라는 말로 비켜갈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심각해지라는 건 아니지만. 원래 그런 일은 없어.”
그렇게 말하고도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원래’라는 말을 너무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나는 솔직히 너와 내가 비슷하다고 가끔 생각해. 그래서 때때로 어떤 인연을 만나고 책임지기에는 우리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해. 우리는 너무 어려. 어리니까 판단하기 힘들 수도 있고, 집중하기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해.”
윤은 내 말에 공감했다. 윤이 공감하며 말을 시작했을 때 나는 이미 집 앞이었지만 근처를 빙빙 돌았다.
- 언니 근데 저 불안해요. 제가 뭔가.. 이 관계를 놓을 선택을 했을 때, 후회할 거 같아요. 저는 아직 오빠를 좋아하거든요.
발치에 걸리는 돌멩이를 툭툭 걷어찼다. 밤공기가 어제보다 덜 하다. 오늘은 덜 춥구나. 누군가 말한 것처럼 눈이 오기 전에는 포근하다는데. 눈이 오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후회할 것 같다’는 말에 마음이 울렁였다.
“맞아. 후회할걸. 엄청 후회할걸. 근데 그게 지금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아마 후회할 거야. 지나간 일은 좋았든 싫었든 다 후회가 되더라고. 다들 후회해. 그 시기가 다른 것 같아. 근데 어차피 결국에는 네 선택과 내 선택들을 후회할 거라면 적어도 지금의 내가 괜찮은 쪽으로 해야지. 내가 이러니 저러니 많이 말해도, 선택은 네가 하니까.”
윤은 그 이후에도 불안하다고 이야기하고 서운하다고 개인의 사정을 털어놓았고. 나는 가만히 들으며 대답했다. 윤은 한바탕 털어놓고 나니 그래도 괜찮은 것 같다고 하다가도 또 불안해했다.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서 더 불안하다고. 그래서 나는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아무 말 없이 그 말에 동의했다. 종종 대답하고 종종 같이 화내 주었다. 서툴렀지만.
윤은 결국 그래요, 더 생각해보려고요 저. 언니 고마워요. 고생했어요.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나는 윤의 마음이 걱정되었지만, 나는 적어도 나의 실패보단 윤이 더 나은 결정을 하리라 믿었다. 언제나 동생이지만 보다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말을 하고, 좋은 마음을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전화를 끊고 집으로 올라가던 길에 어쨌든 잘 지낼 거야. 잘 지내야 돼.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201223
그런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