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과 디디
열은 재작년인가, 작년인가 즈음에 헤어졌다. 그것이 이십 대 초반 시작한 연애의 최종장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웅장하고 슬픈 이별이었다. 최종인만큼 열은 많이 울었다. 한참을 울었지. 전화를 걸면 8할이 우는 시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항상 울고 있었다. 나는 그런 열을 위로해주기보다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보이지 않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만나서 술이라도 마시자. 술 한잔 살게. 하는 말을 했지만 열은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내 생각에 그때의 열은 전 애인을 잊기가 슬프고 힘들고 주변의 모든 것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 같은 그 감각 때문에 나가기조차 싫어했던 것이겠지. 나도 그랬다. 이별 이후에는.
열은 한 달 후에는 그 애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정도가 되었고, 또 한 달 후에는 그 애와 갔던 곳을 가도 괜찮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한 달 뒤에는 정말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괜찮아졌다고 했다. 이별의 후유증은 길어 봐야 3개월인가 싶었다. 그렇지만 다시 시작된 문제는 열이 그 애를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는 일이었다. 간헐적인 관계였지만. 만났던 시간이 긴 만큼 역시 한 번에 헤어지는 것은 어려운 일인가 싶었다. 열은 이것저것 다양한 이유를 붙여 그 애를 만났다. 사실 만나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만나서 해결하기도 하고, 괜찮은 척 안부를 묻거나 잘 지내냐는 말에 대답해주기도 했다. 삼 개월. 짧지만 긴 시간인데도 열과 그 애는 서로 변한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 둘이 진짜로 헤어진 날. 열은 모든 연락을 차단했다. 그 애의 모든 연락을. 그리고 나에게도 짧게 이야기하고 울며 전화했다. 진짜 끝난 것 같아. 이번엔 진짜 마지막인 것 같아. 마지막의 마지막이야? 응, 최종의 최종이야.
열은 헤어지고 울며 걸어온 전화에서 딱 한 번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디디야, 사랑이 뭘까. 열은 그렇게 말하고 또 훌쩍였다. 진짜 사랑이 뭘까 디디야. 뭐라고 이야기해야 될까. 나는 사실 당시 열과 통화하면서 맥주를 4캔쯤 마신 상태였고, 5캔째를 열고 있었다. 칙 하고 탄산이 빠지는 소리 사이로 열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글쎄. 대답하고 한 모금을 마셨다. 솔직히 말하자면 알딸딸하게 취해있는 상태였다. 사랑. 또 한 모금을 마셨다.
사랑은 술 같지.
무미건조한 대답에 열이 훌쩍이던 것을 멈추고 왜? 하고 물어왔다. 왜냐니. 이번에는 캔 위를 툭툭 두드리며 대답했다. 마시는 동안은 좋은데, 너무 많이 마시고 나면 다음 날 꼭 숙취가 오니까. 사랑은 술 같고 이별은 숙취 같지. 타이밍 나쁘게 많이 마시면 너무 취해서 다음날 찾아오는 숙취.
열은 코를 팽 풀고 대답했다. 맞아. 술 같네. 열은 그렇게 말하고 또 되물었다. 그럼 사랑은 왜 끝나는 걸까? 사랑은 왜 끝날까. 나도 계속 궁금했던 말인데. 열은 계속해서 훌쩍였다. 한번 시원히 팽 풀었다고 해서 그걸로 끝나는 울음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중얼거리는 열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은 왜 끝나는 걸까.
사랑이 끝나는 게 아니야. 마음이 끝나는 거지. 사랑은 계속되니까 슬픈 거야. 마음이 끝났는데도 사랑은 계속되니까. 내 대답에 열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럼 나는 왜 아직도 안 끝난 거야. 열은 그 말을 끝으로 계속 훌쩍였다. 우는 것 같았다. 술에 취해 아무 말이나 해버린 나는 아차 싶었다. 짧게 덧붙였다. 그냥, 나도 책에서 읽은 문장—“김금희,경애의 마음” 중 한 문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이야. 사실은 나도 잘 몰라. 사랑이 끝나는지, 마음이 끝나는지. 결국 끝나는 것은 변함이 없지.
열은 그 날을 이후로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연애 없이 산 적이 없던 20대 초반을 지나오는 과도기를 겪은 사람처럼. 노력 중에는 취미도 있었고, 친구들과의 잦은 약속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은 꾸준히 힘들었다. 이별을 이겨내는 것은 노력만으로는 어려운 것이었다. 혼자가 된 밤이면 즐거웠던 추억들 때문에 괴롭다고 열은 얘기해왔다. 그래도 그때 내가 사랑했는데.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나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가 대답해주었다. 그렇지. 행복했지. 근데.. 아직까지 슬픈 점은 행복했던 순간만이 우리 연애의 전부는 아니었다는 거야. 잠깐이었어. 연애 내내 행복할 수는 없었어. 열은 내 반응에, 언젠가 한 번은 그럼 지금 내가 불행해진 이유는 뭐냐고 물었다. 나도 몰랐다. 나는 척척박사가 아니니까. 그래서 같이 생각해 보자고 했다. 왜 불행해졌을까. 그전에 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데?
열은 울음기가 가신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행복하지 않으니까. 행복하지가 않으니까. 열의 이야기를 들은 내가 대답했다. 열아, 행복하지 않으면 다 불행한 거야? 열은 그건 아닐 거라고 대답했다.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다 불행한 건 아니야. 세상에는 행복한 상태와 불행한 상태 둘만 있는 건 아니니까. 열은 다시 울먹거리며 그럼 자긴 어떤 상태냐고 물었다. 목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침을 꼴깍 넘기며 대답했다. 슬픈 상태지. 슬프고 외로운 상태. 열은 놀리는 거냐며 와악 하고 대답했지만 이내 시간이 좀 지나니 울음을 그쳤다. 나는 그즈음 열이 진정한 자기 상태에 대해 깨달은 거라고 생각했다. 때로 내가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내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한 것이다. 사실 열은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라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슬프면 사람은 잠깐 뭔가를 잊는다. 아주 통째로.
지금 열과 디디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 특히 열은 아주 잘 지내고 있다. 슬픔은 바람처럼 사라져서 잘 먹고 잘 지냈으며, 더 이상 괴롭거나 외로워하지 않는다. 열은 건강하게 일도 잘 다니고 밥도 잘 먹는다. 팔 옆의 귀여운 물고기 타투도 생겼다. 열은 가끔 자신이 살이 너무 쪘다며 또 투덜거리지만 사실 그 시절의 열보다 지금의 열이 훨씬 행복해 보이기 때문에 나는 항상 뭐 어때, 하고 대답한다. 돌이켜 보면 저 시절과 우리의 지금이 많이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변한 것은 절대적으로 옆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남자 친구의 존재가 더 이상 필수적이지 않게 되었다고 느끼는 것. 그리고 가볍고 괜한 연애는 하고 싶지 않아 졌다는 것. 또 연애고 사랑이고 하는 것들보다, 내가 나를 챙겨야 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에 띄지 않게 시간이 흐르듯이 우리도 변했다.
열은 가끔 두 번 다시 연애 안 해! 하고 이야기한다. 나도 그렇고. 나보다 남을 챙기는 삶에 지쳤고, 누가 나를 위해 헌신한다는 것도 싫다. 혼자 내버려 뒀으면 하는 마음이다. 당분간은 서로가 혼자인 채로 서로의 고민과 위로를 받아주고, 비는 시간 종종 만나 맥주를 한 잔 기울이는 시간이 더 유익할 것 같다. 사실은 영원히 이 시간이 더 유익할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20210524
사랑이 끝나고 나서야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