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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 Mar 19. 2024

옷을 샀다.

소비를 생각하다.

몇 주를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긴팔티 3개, 경량패딩과 조끼를 샀다. 이월상품으로 모두 57,500원.


원래는 초봄에 조깅할 때 입을 다운 후드 재킷을 사고 싶었다. 너무 사고 싶었다. 그 옷을 입으면 운동이 절로 될 것만 같았다. 이 옷을 입고 공원을 달리는 나, 멋있잖아? 할인해서 7만 원 대인 옷을 장바구니에 넣어놓고 두어 주를 보냈다. 한 달 생활비 60만 원에서 7만 원의 비중은 적지 않거니와, 문제는 간절기용 패딩이 이미 5개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디자인 한 끝 차이로 새것이 너무 사고 싶다. 입지 않는 것을 정리하고 새로 사기에는 기존 옷들이 훨씬 비싸다.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결국 과거의 내 선택에 책임을 지우기로 했다. 그것들도 다 꼭 사야만 할 것 같은 강렬한 충동에 휩싸여 구매한 것이니, 있는 옷들을 먼저 새 옷 태가 사라질 때까지는 입어야겠다고.

 

패딩을 고민하는 사이에, 하나밖에 없는 실내용 긴팔 티셔츠의 소매 끝이 해진 것이 눈에 띄었다. (왜 하나밖에 없냐면 겨울에도 집에서는 반팔을 입었어서.) 이 역시 꽤 오래 고민했다. 어릴 때 한때는 일부러 옷을 찢어서도 입었는데, 그냥 입을까? 손이 잘 가는 기본템 찾기가 은근히 어려운데. 그러다가 헤아려보니 이 옷을 산 게 15년은 더 전이다. 이 옷 또한 처음 몇 년 간은 영 손이 가지 않아서 옷장에 처박혀 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한 번만 입고 버릴 심산으로 입다 보니 계속 입고 어느덧 몸에 착 달라붙듯 편해진 것이었다.


옷 얘기가 나올 때마다 한숨을 쉬게 하는, 큰맘 먹고 구매한 캐시미어 100% 롱코트가 있다. 아주 가끔 차려입을 자리가 있어 샀지만 결국 10년 간 한 번도 입지 않은. 정장을 싫어하는 내가 정말 고르고 골라 힘들게 산 옷인데, 한숨. 게다가 이제 나이도 들고 세상도 바뀌어서,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강연을 하든 꼭 정장을 차려입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냥 짙은색의 패딩에 운동화를 신고 가도 그다지 흉이 되지 않으니.


이 나이가 되어서야 나를 좀 알겠다. 몸에 닿는 것은 100% 면이 아니면 안 입는다. 무거운 옷은 안 입는다. 오버핏은 싫어하지만 넉넉하고 각 잡히지 않은 형태, 특히 어깨선이 내려온 래글란 슬리브를 좋아한다. 기장은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아야 한다. 부드럽고 포근한 옷, 예를 들면 같은 면이라도 가제면을 좋아한다. 여름에도 어지간하면 긴팔을 입고 소매를 걷는다. 바지 허리는 밴딩이 있어야 한다. 머플러와 장갑은 안 한다. 이런 기준에 안 맞으면 아무리 비싸고 디자인이 예쁜 것도 안 입는다.


아무튼 이리하여 오래간만에 옷을 샀다. 이번엔 우리 오래 친하게 지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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