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스토리를 시작하고 육아에 대한 글이 많은 것은 내가 아이를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육아에 관심이 많거나 육아경험을 나누고 싶어서는 아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다른 것을 하는 게 어려웠을 따름이다. 아이는 돌이 지나면서 감기를 달고 살았다. 코로나 시국에 마스크를 모두 하니 덜 아프기 시작한 게 아이러니할 정도로. 아이가 좀 크고 뒤늦게 들어간 박사과정도 아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서는 불가능해졌다. 9시에 학교를 간 아이가 12시 50분에 나온다. 방학이 되면 아무도 내 아이와 대신 시간을 보내주지 않는다. 대학원생은 초등학교에 돌봄도 신청할 수 없으니까 내가 학교를 쉬고 집에서 아이를 보는 수 밖에 없었다. 아이 숙제하는 동안 책 좀 읽으려하면 '엄마, 도와줘!' 소리에 뛰쳐나가야 하고, 금방 밥할 시간이 다가오니 논문 한 편을 읽을 수가 없더라.
그 생활이 내게 준 느낌은, 순수한 고통이었다. 매일 똑같이 똥치우고 밥하고 내일 반찬 생각하고 온라인쇼핑몰에서 주문하고 빨래하고 널고 청소하는 경험이 내 기질에 조금도 맞지 않았다. 예전에 썼던 글 중에 아이가 어항 속 금붕어같다는 글이 있었는데, 18개월 정도까지의 육아는, 종일 '말'이 통하지 않는 종족의 수발을 드는 경험과 같았다. 내가 평생을 공부해온 전공과 외국어실력은, 육아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을 떠나 방해가 되었다. 말도 못하는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허무해지면, 이 생활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전공과 외국어를 하느라 보냈던 시간까지 허무해지니까. 반복적인 행동으로 하루가 점철되면, 반복을 멈추려고 새로운 무언가를 찾으려 하고, 그렇게 유투브를 보느라 새벽 두시 넘어서 잠이 들면, 결국 남는 게 없는데 잠도 부족한 채로 피로한 다음날을 맞이한다. 반복적인 삶의 허무함과 무료함의 2차적 감정은 자괴감과 피로함. 내게 집은 더이상 편안한 공간이 되지 못하고 허무함과 자괴감을 주다가 끝내 우울증으로 옮아갔다.
반복되는 일상은 고통을 준다. 벗어날 수 없다, 즐겁지 않다, 행복할 수 없다, 언제까지 이 삶을 반복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머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내지만 밤부터 낮까지 이어지는 집안일과 육아의 사이클의 무한한 반복에는 새로움이 없다. 두개의 다른 톱니바퀴가 맞물림없이 각자 돌다가 끼긱거리는 불협화음을 낸다. 그렇다고 삶을 멈출 수는 없다. 그래서 생각을 멈추려고 노력한다. 샤워하며 숫자를 센다. 빨래를 개면서 뇌가 녹아내리는 기분이 든다.
물론 그 생활 중에도 아이의 첫걸음마가 있고 아이의 웃음과 포옹과 사랑이 있다. 하지만 후자의 기쁨이 전자의 반복적인 생활이 주는 고통을 없애주진 않는다. 아이가 있어 이 생활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되는 것이, 아이가 씩 웃었을 때 찾아오는 별안간의 기쁨을 없애지 않는다. 아이가 꼭 안아주며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내일은 해야할 옷정리의 하기싫음을 없애주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의 무언가로 기쁨을 얻고 싶지만 거기에 투자할 시간이 없다는 괴로움 또한 크다.
-
일본에 가면 전철을 타고 공항에서 시내에 들어가곤 하는데, 창밖으로 일본의 서민적인 동네의 풍경을 보는 게 즐겁다. 지진 때문인지 2층 혹은 3층 정도로 지은 단독주택들이 작은 발코니를 달고 전철 옆으로 스쳐지나간다. 어느 집에는 빨래한 운동화 같은 것이 2층에 걸려 있고 어느 집에는 덩쿨식물들과 꽃화분들로 꾸며져 있다. 누군가는 갈색의 금속 프레임의 유리문을 밀고 나와 빨래를 널기도 하고 퇴근시간에는 복도식으로 된 맨션의 복도를 지나 어느 철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나는 그 모습들에서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의 내음을 상상한다. 어느 문 앞에 놓인 빨간 우산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일본에 도착하기 몇시간 쯤 전에 비가 왔으려나 싶고, 그 우산의 주인은 집에 틀어놓은 아침방송을 보고 빨간 우산을 들고 나갔으려나 싶다. 그리고 비를 성공적으로 막은 우산은 주인의 손에 들려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귀환하였으나 주인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에 놓이는 운명을 슬프게 받아들였을런지. 접혀지지 않은 채 문 앞에 놓인 빨간 우산에서 방금 스쳐지나간 소나기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에서 비냄새가 나고, 꽃에 물주는 모습을 떠올리고, 나아가 어느 화분인가는 죽고 좌절하는 모습까지 떠오르는데는, 매우 이국적인 그 풍경에도 삶의 모습은 비슷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슷한 삶이라는 걸, 나도 살아보았기 때문이다.
2025.3.9
2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