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가 희망을 이야기하는 법

스픽노이블 리뷰

by 사유의 서랍

점선 아래로 결말을 담은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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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 나온 덴마크영화가 원작인데, 덴마크 영화가 주인공 부부가 죽고 딸이 가해자 가족의 새로운 자식이 되는 것으로 끝난다고 한다. 이 영화를 헐리웃에서 리메이크 하면서 가해자 부부는 응징당하고 주인공 가족은 무사히 빠져나오는 결말로 바뀐다. 나는 이 결말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건 내가 원작의 결말선택에 반발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클리셰라는 말은 클리셰를 비틀기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한다. 선은 악에게 당하지만 끈질기게 살아남아 악을 응징하는 구조는 악이 응징당하지 않는 비틈을 통해 널리 알려진 클리셰다. 하지만 이 비틈은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우리네 일상의 발견을 통해 인과응보의 클리셰가 실제로는 응보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에 타당할 수 있는 비틈이다. 클리셰는 오랫동안 대중에게 살아남을 이유가 있어서 살아남은, 그 나름의 담론을 담고 있는 무엇이다. 그 속에 담긴 대중이 무의식적으로 동의한 담론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그 담론과 맞먹는, 혹은 그를 넘어서는 담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원작이 담고 있는 주제의식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주제의식은 대중이 응보하고자 하는 무의식의 담론을 넘어서지 못한 모양이다. 영화의 후기가 대부분 '무슨 얘기하려는지는 알겠는데 그렇다고 왜 착한 사람들이 죽어야하냐'는 글 투성이인걸 보면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대중의 클리셰를 지켜준(?) 헐리우드 리메이크의 선택은 대중영화의 이름에 걸맞는 선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나름의 주제의식을 담아나간다.



영화의 시작점에 차 뒷자리에 타고 있는 앤트의 불안한 시선을 룸미러를 통해 카메라에 담는데, 이 장면의 의미는 끝날때 같은 장면이 반복되면서 알게 된다. 앤트가 이 장면 직전에 어떤 행동을 했기 때문인데, 그 행동으로 인해 '어딘가로 끌려가는 듯한 피해아동의 모습'처럼 보였던 초반의 앤트의 눈빛은, 후반부에 '또다른 악의 씨앗이 될지 모르는 아이의 모습'으로 치환된다. 같은 장면인데도 말이다. 이 연출이 이 영화를 흔한 공포영화의 공식(인과응보)을 따르면서도 클리셰를 비튼듯 자신만의 뚜렷한 주제의식을 드러낸 영화로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에서야 악이 싹트는 순간을 목격한 것과 같은 새로운 공포를 선사하는데에는 제임스 매카보이의 연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매카보이는 마초적인 가부장의 모습을 하면서도, 동시에 상처받기 쉬운 눈빛을 비춘다.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지나친 열정때문인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게 만들고, 폭력과 억압을 드러내다가 온정과 공감으로 포장하기도 한다. 여러가지 모순적인 두 면모들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하나의 표정에 담는다. 그래서 앤트가 보이는 모습이 마치, 매카보이가 연기한 패트릭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앤트가 보이는 선한 모습과 상처들이 패트릭이 가진 선과 악의 양가적인 특성 중 하나여서, 앤트의 특정 행동 이후에 앤트가 필연적으로 (이전의 앤트는 가지고 있지 않았던) 패트릭의 '악'의 특성을 가지게 될 것으로 추측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담지 않은 영화의 시작 전에 패트릭은 앤트의 어린 시절을 하고 있었을 것 같고, 영화가 끝난 후에 앤트는 패트릭이 될 것 같다.



나는 이것이 선과 악이 모호하다는 정도의, 인과응보를 넘어설 수 있는 담론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태어날 때 악하게 태어나나? 선하게 태어나나? 선하게 태어난다면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 악하게 태어난다면 선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진리 중 하나는, 폭력은 또다른 폭력을 낳는다는 것이다. 범죄자는 어릴 때 학대의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피해자가 또다른 가해자로 크지 않는다. 누군가는 폭력을 답습하지 않고 그 고리를 겨우 끊으며 살아낸다.



여기에 루이즈라는 캐릭터가 등장한 이유가 설명이 된다. 루이즈라고 완벽하게 선한 인간형은 아니지만 적당히 사회생활이 가능한 얼굴을 하고 가족을 돌보며 아이를 보호한다. 산업형 축산물을 먹지 않기 위해 비건생활은 엄격하게 지키고 패트릭의 가족의 이상한 모습을 발견하자 '이상한 사람이 되더라도' 이 집에서 빠져나가자고 남편에게 요구한다. 루이즈는 일상을 살아가며 적당히 선하고 적당히 악한 모습으로 자신만의 선을 지키며 살고 있다. 그런 루이즈의 작은 선택들이 빛을 발하는 때가 루이즈가 패트릭을 죽일 수 있는 순간이 다가왔을 때다. 루이즈는 패트릭을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자신과 가족이 위협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정도만 공격을 가하고 도망치는 편을 택한다.



루이즈는 자신의 폭력을 합리화하는 작은 선택들을 거부한다. 그 선택은 심지어 위협이 눈앞에 있어서 미래의 안전을 위한 폭력으로 충분히 합리화될 수 있는 순간에도 동일하다. 이 작은 선택들이 시아라(패트릭의 부인)와 루이즈의 현재를 가른다. 시아라는 패트릭이 자신에게 행한 폭력을 다른 아이에게 반복하는 또다른 범죄자가 되어 있다. 이것은 두 가지를 보여준다. 1) 폭력은 이미 자신이 당한 폭력으로 자신의 폭력을 합리화할 때 답습된다. 2) 폭력의 답습은 일상의 사소한 선택들로 끊을 수 있다.



원작과는 달리 루이즈가 살아남은 리메이크작의 결말은 그래서, 영화가 '악이 전염되는 방식'을 전시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폭력을 경험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 폭력을 답습하지 않을 희망의 고리를 발견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루이즈가 비건으로 등장하고, 체면을 버리더라도 가족을 보호하려하는 역할임을 인지하고나면 앤트의 미래도 달리 추측될 수 있다. 앤트가 루이즈의 차를 타고 도망치고 루이즈의 가족과 함께 자라난다면, 루이즈는 더이상의 작은 선택들을 교정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지 않을까? 이미 폭력의 첫 고리를 걸어버린 후라도 말이다.




2024.09.18

개봉날 보고 일주일동안 머뭇거리다 쓰다. 공포영화는 너무 어려워.




- 개인적으로 제목이 별로다. 뭔가 영어학원 이름이나 인터넷 영어교육 프로그램명일 거 같은, 깊이가 없는 느낌이 난다. 악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 에서 '악은 말하지도 말라'만 따온 거라고 하는데, 그러면 '입에 담지도 말라' 같이 보다 직접적이면서 격언같은 느낌의 제목을 지었어도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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