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브스턴스> 리뷰
* 본 리뷰는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구원한다. 인간은 그러하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알고 태어나는 것 같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사랑을 갈구하며 자신을 구원할 누군가, 무언가를 찾아 인생이라는 여행을 떠난다. 인생의 여정에서 운명처럼 느낀 인연도 있고 하룻밤으로 끝나고 마는 감정도 있다. 아이가 태어나는 보다 긴 관계도 있고 인생의 대부분을 한 사람과 연을 맺고 그 사이에 죽음을 경험하는 관계도 있다. 제도 안에서 안정된 무엇을 찾지 못하고 제도 바깥에서 설렘을 찾아 방황하기도 하고 이미 지나가버린 사랑에 집착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 속에서 또 누군가는 생각할 것이다,
'나를 오롯이, 진정한 마음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은 왜 없을까'
구원이 사랑'받음'에 있다고 그 누구도 정의해준 바 없는데 어느새 이 시대는 '받고싶은' -그러나 오지 않는- 사랑을 향한 목마름을 사랑 그 자체인 것처럼 다룬다. '사랑받음'의 판타지다.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은 날 사랑해줄 한 사람을 찾아다니며, 그 와중에 날 사랑해주는, 하지만 내가 찾는 사람은 아닌 '서브'들이 하나 혹은 둘이 등장한다. 주인공이 받는 사랑은 그를 어떤 위험으로부터 구해주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사랑받지 못했다는 감각으로부터 떠날 수 있게 도와 '사랑받음'의 판타지를 더욱 굳건히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판타지를 뒤집으면,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나자신이 가진 문제 때문이라는 가치관이 보인다.
영화 <서브스턴스>는 이 판타지의 뒤집어진 단면만을 다룬다. 나이가 들면서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느끼는 엘리자베스는 젊어질 수 있다는 약물광고를 접한다. 나이들어 더이상 화면에 '탱탱하게' 나오지 않는 몸매가 엘리자베스가 최초로 느낀 자신의 문제점의 전부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몸매만을 자극적으로 클로즈업하는 카메라가 엘리자베스가 젊었을 땐 환호하고 나이든 후 환호하지 않고,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제작사 대표가 그를 해고하고 젊은 여자를 구하며, 젊어진 엘리자베스-수-가 다시 그 프로그램에 재고용되어서 카메라의 중심에 섰을 때, 엘리자베스는 더이상 단 하나의 문제점으로 향하는 시선을 외면할 수가 없다. 자신의 나이듦이라는 문제, 나이들어 '흉해진' 외모라는 문제, 나아가 자신에게는 외모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문제. 엘리자베스는 젊어지는 약을 주사받고 난 후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늙은 외모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더욱더 몰아쳐 간다.
이 영화가 보는 이에게도 가혹하다는 평을 받는 이유는 끝의 끝까지 사람의 정신을 몰아가는 시각적 연출 때문도 있겠지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여유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판타지까지 앗아가는 면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학창시절 자신을 좋아했던 남자에게 여전히 아름답다며 연락처를 받고, 자신의 외모 때문에 사랑받지 못한다는, 온전히 자기파괴적인 생각으로 들어가기 직전, 이 남자에게 연락을 한다. 아마도 이 영화가 아니었다면 엘리자베스는 이 서브남 롤의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고,' 그렇게 자신의 존재이유를 '되찾고' 수가 되어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을 스스로 멈췄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창밖에 걸린 수의 전광판을 보며 끝없이 자신의 나이듦을 발견하고 이내 외출하기를 포기한다.
이 장면은 판타지의 깨지기 쉬운 얄팍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남자의 몇마디가 엘리자베스의 자기파괴를 정말 멈출 수 있었을까? 온세상이 너는 나이들었다, 더이상 섹시하지 않다, 섹시하지 않은 너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전광판으로, 티비로, 선물하는 책까지 외치고 또 외치는데, 남자 한 명이 이 세상 전부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엘리자베스가 그 남자를 만나고 그 남자의 '여전히 아름답다'는 말을 믿어서 더이상의 폭주를 막았더라도 얼마나 오래 믿을 수 있을까? 여전히 아름답다는 말에 '여전히'에 방점을 찍으면 로맨틱하지만 '아름답다'에 방점을 찍는다면 달리 보인다. 동창생은 예전에도 엘리자베스의 외모를 좋아했고, 지금도 외모를 보고 있다는 건 그리 로맨틱하지 않은 이야기다.
엘리자베스가 폭식을 하고 수가 지난 밤 엘리자베스의 폭식을 보고 혐오스러워하며, 끝내 엘리자베스를 죽을 때까지 때리는 것은 자기혐오에 다름아니다. 뿌리깊은 자기혐오의 사슬을 고작 서브남의 짝사랑 하나로 끊을 수 없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사랑을 한다는 것의 응답으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사랑을 한다는 건, 자기자신을 믿어야 가능한 일이다.
자기를 구원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사랑 뿐이다.
<서브스턴스>에서 엘리자베스는 '그들'이 드러낸 가슴을 좋아하자, 분열된 세포 속에서 가슴을 토해내면서까지 노력하다 죽는다. 엘리자베스가 죽었든 수가 죽었든 모르는 괴물 몬스트로가 죽었든지 간에, '그들'은 또다시 다른 가슴을 찾아내고 다른 엉덩이를 찾아내고 날것으로 비추고 늙을 때까지 자극적으로 뽑아내고 어느날 필요없어지면 버리는 삶을 똑같이 살 것이다. 그들에게 한 엉덩이가 자신을 구원하든 아니든 무에 중요하겠는가?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왜 그들이 엉덩이를 바라건 가슴을 바라건 뭐가 중요해, 라고 반문하지 못했을까. 늙어가면서 잃어가는 것 대신 늘어가는 것을 찾아볼 수는 없었을까. 자극적인 것을 찾아 매일이 바뀌어가는 전광판 대신 자신의 마음에 확성기를 달 수는 없었을까.
...나는 나를 사랑해줄 사람을 찾아다니지 않았나? 나를 사랑해주는 대신 요구하는 것들에 마음이 오염되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내 인생의 남주인 나 자신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는가? 나는 나 자신을 조건없이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과연, 엘리자베스와 다른 삶을 살 자신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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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비를 켜면 무한대로 반복되는 사랑받음의 판타지를 본다. 그 판타지는 내가 마르고, 예쁘고, 젊어야 들어갈 수 있는 세계다. 그리고 마름, 예쁨,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약과 병원과 운동과 식이를 소개한다. 현대사회의 자본모세는 인류를 성형과 다이어트의 땅으로 인도하는 것 같다. 그 땅에 이르러 성형과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나는 사랑받고 구원받을 수 있을까? 수가 되어 짧게 누린 영광이 끝나 다시 엘리자베스를 맞이해야할 시기가 오면 수가 그러했듯 다시 성형과 다이어트를 하지 않을까.
현대여성들의 외모에 대한 강박을 동력으로 돌아가는 자본시장이 어떻게 삶을 무너트리는지를 영화 <서브스턴스>는 시각과 청각을 동원하여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산업에서 섹시bomb으로 키워진 인간은 상품화 기간이 끝났다고 삶이 끝나지 않는다. -잘 팔리든 못 팔리든-인간이 물화되는 경험은 삶을 파괴하고 나아가 사회전체에 외모강박을 전염병처럼 퍼트린다. 또다른 아이가 해안가 오징어처럼 널린 가슴들을 보고 자라 또다른 가슴쇼를 만든다. 천박한 상품의 산업이 사람만 바뀐채 순환한다. 그 속에 그 누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
2025.02.24
3주간 소화후 리뷰를 씁니다.
- 호러를 원래 못 보는데 너무 궁금해서 봤거든요. 말그대로 속에 있는 걸 눈앞에 확인할 뻔 했어요. 사실 토나오는 건 엘리자베스를 소비하고 수를 소비하려고 한 그 제작사대표일텐데 우리 몬스트로에게 토나올뻔해서 미안해
- 호러장르라는 느낌을 받았던 건 몬스트로가 아니라 그 전에 꿰매고 주사놓고 이뽑는 그런 장면 ㅠㅠ 감독님 좀 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