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썬더볼츠*> 리뷰
- 본 리뷰는 영화<썬더볼츠*>, <캡틴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어벤저스> 시리즈와 <블랙위도우>의 결말을 담고 있습니다. 스포일러 주의.
영화의 시작, 옐레나(플로렌스퓨 분)가 고층빌딩의 옥상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다. 언니가 죽은 후 공허함이 찾아왔다는 독백을 하며,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눈을 한번 감았다가 뜨더니 미련없이 뛰어내린다.
영화의 중후반부, 옐레나는 또다시 무언가의 끝에 서있다. 보이드가 자신의 어둠으로 모두를 그림자로 만들어버리고 있는 아수라장의 앞에서다. 카메라는 그녀의 정면에서 그녀가 눈을 감았다 뜨는 것을 보여주더니 첫장면과 같이 그녀의 옆면을 비추고 이내 옐레나는 앞으로 걸어가 그림자 속으로 '뛰어든다.'
첫장면과 중후반부의 '뛰어듦'은 댓구를 이루듯 같은 구도, 같은 카메라 각도, 같은 자세로 반복되지만 달라지는 것이 하나 있다, 옐레나의 표정이다. 옐레나는 공허함에 빠져 마치 극단적인 선택을 하듯 뛰어내렸던 첫장면과 다르게, 후반부에서는 뭔가 결심을 한듯 결연한 표정을 하고 있다. 그녀는 달라졌다. 언니의 죽음을 겪고 후회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공허함(void) 속에 어쩔 수 없이 빠져들었던 그녀는, 이제 void의 영역으로 다른 이를 구하러 '스스로' 걸어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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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져스들이 거대한 외부의 악을 물리치고 죽고 흩어지고나서 몇 년이 지나고, 마블은 영화 속 히어로들처럼 다음 세대의 히어로를 만들지 못하고 헤매는 모양새였다. 애초에 어벤져스의 해체가 -각 역을 맡은 배우들의 몸값이 비싸서, 혹은 배우가 늙어서, 였는지- 성급하게 일어난 것과 같이 페이즈4 이후의 새로운 세계관의 구축 또한 성급하고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이터널스는 '그래서 신이 왜 지구를 구한대?', 같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부터 하지 못하는 신들의 엉성한 앙상블을 보여줬고, 판권이 흩어진 여러 히어로들을 모으기 위해 편리하게 이용해왔던 멀티버스는 MCU 영화들의 진입장벽을 높였다. 안그래도 시리즈의 이전 영화들 줄거리를 잊을만한 시간동안 마블은 드라마로, 다양한 솔로무비로, 멀티버스 소재의 서사를 다채롭게도 쌓아놓아서, 닥터스트레인지가 살아남았구나, 정도만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 그의 솔로무비는 MCU 박사학위 논문같은 배경지식을 요구했다.
연이어 흥행에 빨간불이 켜지는 솔로무비들 속에서, 그나마 어느 정도 제작비를 상회하는 수익을 벌어들이는 솔로무비는 세대교체용으로 이용당했다. 블랙위도우에서 한참은 더 활약해도 될 것 같은 나타샤가 죽고 비슷한 서사를 가진 옐레나가 등장했을 때, 마블 팬들은 배우의 몸값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셀레스티얼 떡밥을 이터널스에 넘긴 채로 역시 솔로무비가 종료되었다. 스타로드와 로켓이 돌아올지는 모르지만 솔로무비는 돌아오지 않는다.
MCU를 이루는 세계관이 인피니트사가에서 폭발할 수 있었던 데는 아이언맨 시리즈가 MCU의 중심을 이루면서 탄탄한 서사를 쌓아올린 덕이 크다. 아이언맨 솔로무비가 쌓아올린 서사에 캡틴아메리카 솔로무비의 서사가 마주선 다른 서사를 쌓아올리고, 두 서사가 캡틴아메리카 솔로무비에서 조우하며 대립했기에 어벤져스 시리즈만으로는 불가능했을 거대하고 개연성있는 마블시네마의 유니버스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인피니티사가 이후의 세대교체용 솔로무비는 새로운 어벤져스의 유니버스를 구성하는 새로운 서사쌓기를 디즈니플러스의 드라마들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은퇴하기만 바빴다. 디즈니플러스의 드라마는 접근성이 낮고, 그를 배경으로 새로나오는 팀업무비들은 규모만 거대한, 엉성한 팀업과정만 빠르게 보여줌으로써 관객을 납득시키는데 실패했다. 그 와중에 새로 나온 캡틴아메리카의 솔로무비는, 이전작에서 보여준 탄탄한 서사는 뒤로하고 -안그래도 판권 등의 문제로 이미 너덜너덜하게 이용 당한- 헐크를 재활용하고 있으며, 슈퍼솔져 혈청을 맞지 않은 인간의 고뇌에 열심히 집중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어벤져스로 끝을 맺는다. 마블유니버스에 희망을 놓지 못하고 힘겹게 따라가는 관객들에게 마블은, '어벤져스로 빨리 떼돈을 벌거야'와 같은 메시지만이 뇌리에 남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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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U의 팀업무비에서 팀업과정이 의미있게 다가오는데는 솔로무비에서 쌓아올린 개인의 가치관이 충돌하며 결국 조화를 이루는 과정을 납득할만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토니스타크와 스티브로저스가 충돌하는 것을 바라보며 관객은 각 솔로무비들의 이야기와 둘이 함께 연관된 이야기에서 '악은 무엇인가', 하는 삶의 근본적인 물음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 MCU이전의 블록버스터가 규모가 큰 세계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액션, 다채로운 적에 맞서싸우는 선한 인간이 승리하는 다양한 방법을 목격하는 재미였다면, MCU는 여기에 더해 싸움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이유를 관객 개개인의 삶의 경험차원에서 납득시키는 묘미가 있었다.
하지만 아이언맨과 캡틴아메리카를 인피니티사가를 끝으로 은퇴시킴으로써, MCU는 이도저도 못하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다. 아이언맨과 캡틴아메리카가 충돌했던 이유를 다음 페이즈에서 다시 써먹을 수는 없다. 같은 철학적 기반을 가진 자기복제적 스토리를 기존 마블팬들이 좋아할 이유도 없지만 다음 세대에서 먹힐 것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철학적 기반을 짜기에는 그것이 먹힐지도 알 수 없지만 이미 팀업무비와 솔로무비 스케쥴을 짜놨기에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그렇게 솔로무비와 팀업무비를 망궈먹은(?) 마블은 <캡틴아메리카;브레이브 뉴월드>(이하 브뉴월)에서 -스파이더맨에서 익숙한- '인간적 고뇌'를 들고 나오더니 여전히 팀업을 위한 빌드업에는 실패한다. 대체 인간적인 고뇌에서 팀업의 필요성이 왜 전개되느냔 말이다. '팀의 리더가 혈청을 맞지 않아 힘이 없으니 초능력자 팀원이 필요해욤' 같은 귀척은 영화제작사가 할 그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썬더볼츠*>는 모두의 포기(?)를 한몸에 받았다. 실오라기같은 마지막 희망은 브뉴월에 놓아보내고 제목부터 유치찬란한 <썬더볼츠*>에 보낼 기대가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블랙위도우의 자리를 이어받은 옐레나, 인피니티 사가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빌런출신 국회의원 히어로 버키, 그리고 잘 모르는 사람들(...)로 구성된 팀에게 충분한 서사, 철학적 기반, 개연성있는 팀업을 요구하기엔 너무(?)한 것 같았다.
- 후편에서 이어집니다.
2025.05.18
MCU 평론을 하고싶었던 것은 아닌데;;;
- 사실 블록버스터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쩌다보니 앤트맨1을 빼고 MCU를 다 본 후천적 마블팬
- 최애는 토르, 솔로무비 중에서 토르1을 가장 좋아합니다. 존중해주세요(?)
- MCU는 마블씨네마틱유니버스(아니면 어쩌지). 마블코믹스를 기반으로 한 세계관 전체가 아니라 마블 영화에서 구현한 세계관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 가오갤은 팀업무비지만 보다 거대한 팀업무비인 어벤져스 시리즈에 합류하므로 상대적으로(?) 솔로무비로 썼습니다. 썬더볼츠도 지금은 뉴어벤져스라는 팀을 이루는 팀업무비지만 영어벤져스와 함께 어벤져스 팀업무비에 합류한다면 나중엔 솔로무비로 여겨지지 않을까,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