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퀴어를 발견하세요

영화 <queer> 리뷰

by 사유의 서랍

* 스포일러 주의: 영화 <퀴어>의 결말이 포함된 글입니다.






나는 루카구아다니노 감독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그가 찍는 영화가 퀴어무비기 때문이라거나 그가 게이라서(..싫어할 이유가 있나?) 같은 이유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오히려 다큐같거나 다듬어지지 않았던 느낌의 퀴어무비가 그의 영화들로 인해 저변을 넓히고 상업영화로서도 의미있는 성공을 남긴 것은 그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성정체성을 찾고 인정하는 여정은 일종의 인생의 해답과 같은 것이기에 -내가 그간 봐왔던 몇안되는 -퀴어무비에서는 동성애인을 찾는 것이 궁극의 사랑과 같이 여겨졌더랬다. <Call me by your name>에서 서로를 희롱하는 듯 둘의 만남은 가볍기 그지없고, 둘이 마치 더없는 사랑을 찾은 것 같은 절정을 지나니 결말에는 어이없이 헤어져 버리고 만다. 이 영화를 보고 퀴어무비에서 동성애가 '스쳐지나가는' 사랑처럼 묘사될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본즈앤올>은 퀴어무비가 다른 장르가 될 수 있음을 보았고.


<챌린저스>는 각본가 저스틴이 깔아둔 몇 장의 레이어가 구아다니노를 만나며 몇 장이 더해지고 몇 장은 깊어지고 몇 장은 이해가 쉬워진다(+젠다야를 만나며 타시의 캐릭터가 인간적이 되었고). 은유는 좀 더 분명해지고 음악과 구도, 대비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서 영화가 구조적으로도 온전해지는 것을 보며 구아다니노의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새삼 느꼈다. 대단한 감독이다. 영화를 너무 어렵지 않게 만들면서 아름답게 만들고 그러면서도 하고싶은 이야기는 꼭꼭 다져넣어 만든다. 그가 만든 영화를 보면 동성애든 이성애든 양성애든 우리는 사랑을 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그게 음악과 구도와 캐릭터, 스토리 어디에든 녹아있다.


다만 그 사랑이야기를 다져넣으면서 꼭 서비스컷처럼 남성의 몸을 카메라가 훑는 순간이 한번씩은 있는데, 그 장면이 나와 구아다니노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 여자의 몸이 아니라 남자의 몸이라서 낯설었냐면, 아니다, 오히려 좋아할 수 있는 순간일텐데, 나는 그 장면들에서 '예술영화랍시고' 맥락없이 추가되는 여성의 나신이나 혹은 ㅅㅅ장면에서 '가볍게' 여성의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영화들이 떠올랐다. 길거리에서 내 가슴을 기습적으로 치고가는 어떤 남자의 팔꿈치처럼, 지하철에서 우연인 것처럼 내 허벅지를 쓸고 가는 어떤 아저씨의 손바닥처럼, 의도가 가득하지만 어딘가에 숨어있는 그 시선이 불쾌했다. 영화의 내적 완성도를 위한다며, 혹은 법망을 피해 대중들이 좋아할 자극적인 장면을 넣어야 한다며 카메라 뒤에 숨은, 감독의 사적인 욕망이 눈을 번뜩이는 듯했다. 그것이 남자라고 안 느껴지지 않았다. 엘리오의 상반신을 느릿하게 훑는 카메라가 나는, 불쾌했다.


영화 <퀴어>는 안 그래서 이 리뷰를 쓰고 있느냐면, 아니다. 오히려 더하다면 더하고, 한발 더 나아가 감독의 시선을 그대로 녹인거 아닌가 싶은 의심도 든다.


나이든 동성애자인 리는 젊고 아름다운 남성을 찾아 밤길을 헤매다니다 젊고 아름다운 -이성애자로 보이는- 유진을 만나 그와 자기위해 한달을 안달복달하며 그의 옆을 지킨다. 끝내 그와 자는데 성공하지만 그 이후로 유진은 오히려 리를 피하는 듯하다. 그와 다시 이어지기 위해 큰 돈을 들여 함께 남미로 여행을 떠나지만 그와 '합일'을 이룬 후에 리와 유진은 영원히 헤어진다.


리가 유진을 탐닉하는 시선만이 영화 속에 가득하니 내가 이 영화가 의도한 관객이 아닌 것 같다. 공감이 가능한 짧은 시간에도 내가 리가 된듯 유진의 외모에 감탄하거나, 내가 유진이 된 듯 영화에게서 도망쳐 다닌다. 영화 <챌린저스>에서는 날아다니노로 불렸던 구아다니노 감독이 이 영화에선 '드러누웠노' 소리를 들었다는 게 이해가 갔다. 그 정도로 영화를 못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뭔가 판을 벌려주니 끝없이 가는 것 같았다.


https://youtu.be/s18Cu1NqX78?si=hsvCnlmzlQXOojwC


이 영상에서 구아다니노 감독이 인간의 욕망과 연결을 담는다는 인터뷰를 보고, <퀴어>를 다시 한번 보았다. 감독은 이 영화가 사랑이야기라고, 다만 서로의 타이밍이 어긋나는 사랑이야기라고 말했는데, 그렇다기에 영화는 유진의 마음을 너무 감춰두고 있어 유진의 사랑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이해하고 싶었다.


두번째 봐도 잘 이해는 가지 않았다. 끊임없이 상대의 몸을 평하고 탐하는 듯한 리, 야헤를 통해 리와 합일의 춤(?)을 추는 유진을 보며 두 배우가 연기하기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은 확실히 들었다. 유진이 나이든 남성에게 무의식적인 선망을 느끼지 않았나, 혼자 가정을 해봤는데, 그럼에도 유진이 '사랑'까지 도달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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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분명하게, 유진이 문을 열고 싶지 않아하는 심리는 이해가 갔다. 그는 함께 남미로 떠났고, 약쟁이 할배를 걱정하고 병원에 데려갔으며, 그의 사진을 찍었다. 호감은 분명히 보인다. 리가 마약에 중독된 할배라고는 하나, 작가에 부자라는 면은 그를 여유로워보이게 했을 것이다. 유진은 분명히 나오진 않지만 직업이 확실치 않고 벌이는 더 확실치 않은데, 그런 20대의 입장에서 멋진 직업에, 여유가 있는 40대는 매력이 있어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그 40대가 유진의 몸을 탐하는 걸 느꼈을 때 유진의 호감은 리의 욕망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리의 입을 통해, 그리고 유진의 입을 통해 두 번 반복되는 대사가 있는데

I'm not queer. I'm disembodied.


직역하자면 '나는 동성애자가 아니야, 나는 그저 (몸과) 유리된 거야', 정도의 뜻일텐데, 리의 뜻과 유진의 뜻은 다르게 나오는 것 같다. 먼저 리는 동성애자가 분명한데 이런 대사를 하는 것으로 봐서는 '나는 괴상한 게 아니야. 그냥 세상(의 이해)과 따로 노는 거야.'의 의미로 이야기하는 것 같다. 유진은 야헤를 먹고 합일을 경험하고나서 이 말을 하는데, 나는 이 때 'i'm not queer'는 직역하듯이 '나는 동성애자가 아니야'로 읽힌다. 그도 그럴 것이, 유진은 리가 '육체적'으로 접근할 때 처음만 받아들이고 두번째는 거부를 넘어서서 싫어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먼저 리에게 인사하고, 리가 초대했을 때 먼저 침실로 들어갔다. 그래서 'i'm disembodied'가 이때야말로 '나는 정신과 몸이 따로노는 거야'로 들린다. 유진이 리에게 느끼는 호감은 육체적인 욕망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이 상태에서 리의 접근을 허용한 결과 오히려 둘의 단절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유진과 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둘은 여러가지 단절을 넘어야 한다. 리는 육체적으로 성급하게 접근해서는 안됐을 것이다. 아마도 후반부의 상상의 호텔방에서 그는 이것을 후회하며 늙어가는 것 같다. 유진도 가이드가 되어 남미를 다시 갔다는 걸로 봐서는 리에게는 열리지 못한 문이 다른 사람에게는 열린 것이 아닌가 한다. 유진이 열어야 했던 문은 한 사람에게 정착하는 것이자, 자신의 동성애지향을 인정하는 것, 상대가 보기 싫은 순간이 있더라도 상대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는 것, 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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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퀴어>는 단절을 이야기한다. <Call me by your name>에서 너가 내가 되고 내가 너가 되는 연결을 다룬 이후에 잠시 나온 쓸쓸한 단절은 영화 <퀴어>에서 주제가 되었다.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기를 욕망하고, 그걸 가진 이들과 연결되길 바라지만 지나친 욕망은 장애물이 되기도 하고, 부족한 욕망은 상대의 욕망에 잡아먹히기도 한다. 리의 강한 욕망은 무한대 모양의 뱀으로 형상화된다. 연결에 대한 강한 욕망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지만 상대를 기다려주지 않음으로써 결국 그 관계를 종식시킨다. 유진의 약한 선망은 관계를 진전시키지 못한다. 세상으로부터 괴이쩍은 존재로 남지 않길 바라지만 누구보다 자신에게 퀴어인 존재들.



동시에 <퀴어>는 그 어떤 영화보다 강하게 연결을 이야기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리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함으로써 자신의 지나친 욕망이 잘못되었음을 이야기한다. 유진은 새로운 관계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임으로써, 연결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래서 그는 구불구불 우회는 하지만 끊임없이 나아가는 지네를 목에 달고 있다.


구아다니노 감독은 다시, <퀴어>라는 제목으로 직접적으로 퀴어무비를 만들면서 보편적인 인간관계를 담는다. '결심하지 못하는 약한 마음'과 '강한 욕망이 소통을 가로막는 인간형'은 어느 인간관계나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다. 이성간의 연애를 통해 사랑을 논할 수도 있고 동성간의 연애를 통해 사랑을 논할 수도 있다. 나는 후자를 구아다니노 감독을 통해 구체화된 영화를 본다. 그는 퀴어무비를 찍지만 그의 영화는 queer하지 않은 이야기를 한다. 그의 영화에 나오는 퀴어들은 퀴어이고 동시에 퀴어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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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화에서도 난 여전히 여성관객으로는 그와 멀어지는 경험을 두어번 했다. 탁자 위에 떠있는 다리없는 여성의 나신이 왜 영화에 나오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리를 피하는 유진을 찾으러 유진의 집에 들이닥친 리 앞으로 왜 유진이 성기를 덜렁거리며 나와야 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유진 이전에 지네목걸이를 한 남성은 왜 등장해야했는지, 왜 나신으로 나왔는지에 다다라서는 생각을 멈추었다. 이 모든 장면이 나오면서 영화가 30분은 길어지는 것 같아 더 이해가 안된다. 이런 부분들이 나를 조용히 영화에서 소외시킨다. 그의 영화에서 관객은 가끔 퀴어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용히 기다린다. 구아다니노가 변하길 바라는 게 아니다. 그는 연결을 이야기하는 감독이니까, 나아가 관객과의 연결까지 생각하는 감독이니까. 나도 그 연결에 언젠가 새로운 이해를 통해 동참하게 되거나 반대로 그 연결에 여성관객은 없구나, 하고 더이상의 관람을 거부하거나, 혹은 지금처럼 흐린눈을 하면서 부분부분만 모른척하고 넘어가겠지.



그가 나아가고 싶은 세상은 I'm queer. I'm embodied.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는 무척 '나'이지만-괴상한 부분도 있고 남들과 다른 성적 지향도 있지만- 세상과 유리되지 않고 나를 이해하는, 내가 이해하는 연인이 생기고, 그렇게 나의 세계와 합일을 이루는 것. 그리고 '나의 나다움'과 '세상에 어우러지는 일'이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and'로 이어지기를, 그는 바라는 것 같다. 그의 영화가 불편한 부분도 있지만 나는 여기에 동의하니까 매번 그의 새로운 영화를 보러간다. 나의 퀴어함을 깨닫지만 세상에 퀴어로 남지 않기 위해서.



2025.7.3

I'm queer. And I'm embodied.


- 영화 보고 혼자 쿨의 <애상>을 중얼거렸다.


L:

알잖아 너를 이토록 사랑하며 기다린 나를

뭐가 그리 바쁜지 너무 보기 힘들어 넌 도대체 뭐하고 다니니


Y:

그게 아냐 이유는 묻지마 그냥 믿고 기다려 주겠니

내게도 사랑을 위한 시간이 필요해 널 받아들일 수 있게


L:

일부러 피하는 거니 (No) 삐삐쳐도 아무 소식 없는 너

(Oh no) 싫으면 그냥 싫다고 솔직하게 말해봐


말리지마 내 이런 사랑을 너만 보면 미칠 것 같은 이맘을

누가 알겠어 웨딩드레스 입은 니곁에 다른 사람이


난 두려워 나보다 더 멋진 그런 남자 니가 만날까봐


Y:

아니야 그렇지 않아 정말 너 하나뿐야 속는 셈치고 한번 믿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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