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정식 학교는 아니지만, 어학원에 등록하고 다시 학생이 된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었다. 매일 동네 마트에 가고, 숙소 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간혹 ‘지프니’를 타고 도심으로 마실을 가는 평화로운 일상. 정전으로 촛불을 켜고 저녁을 먹어도, 화장실에서 바퀴벌레가 나와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어느 해가 저문 밤,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한국에서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우린 호기심 넘치는 이방인이었다. 같은 반 일본 여자 아이와 나는 홀린 듯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걸어가 그 대문 앞을 기웃거렸다. 활짝 열린 문 안에서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사람들. 일가족에 친구들 무리인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무를 즐기고 있었다.
우린 꾸벅 인사를 하고 한쪽 의자를 나란히 차지하고 앉았다. 한참을 구경하며 손뼉 치고 깔깔대다 흥이 오른 일본 아이가 말했다. “고마운데 뭐라도 줄까?” 그 아이는 갑자기 가방 속에서 필통을 꺼내 볼펜을 집어 들었다. “뭐 하는 거야? 고마운데 볼펜을 왜 줘. 얼른 집어넣어.” 한참을 망설이던 아이는 내가 완강히 말리자 ‘아, 좀 그런가.’ 하며 아쉬운 듯 필통을 다시 정리했다. 좀이 아니라, 많이 그렇거든.
수년 전 ‘한국에도 이런 거 있어?’ 하고 물으며, 휴대폰을 내보이던 일본의 주방장 아저씨(#‘두 시간 앉아 십만 원’에 등장하는 주방장의 동료로 다른 사람이다.)가 생각났다. 옆에서 그 말을 같이 들었던 점장은 그의 말이 필시 농담이었을 거라고 나를 토닥였지만, 그다지 농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나는 다만 속으로 응답했다. ‘바보… 한국이 더 발달됐거든.’ 한국에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볼펜’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지금쯤은 과연 그도 알게 되었을는지. 부디 알게 되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