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so Oct 06. 2023

돌싱타임라인

이혼 후 택배를 합니다 01

돌싱타임라인


사람은 때때로 내가 고민할 줄 몰랐던 일이 평생의 숙제가 되기도 한다. 문제가 불거져오기 전 주로 이런 걸 고민하며 살았었다. 반의 반 남은 아파트 대출금, 여름휴가 계획, 아이 기침이 길게 가는 것, 한 달 안에 삼 킬로 빼기, 치팅데이 메뉴, 물티슈의 평량 같은 것들. 이 사소한 잔잔바리 고민들이 얼마나 사치로운 고민거리인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으니 과거의 태평한 나에게 한마디 하자면,


딱 각오해라.


근데 그랬다. 신혼 전셋집에서 새삥 아파트로 옮긴 5개월 차 임산부시절 미혼 친구의 ‘비교적 어린 나이에 대충 이뤄놓으니 어때?’라는 질문(물론 지금은 곰 같은 듬직한 신랑 만나 예쁜 딸 낳고 훨씬 잘 살지만), 중학교 동창의 ‘분기별로 해외여행 가면 달리 새롭지도 않겠다’따위 부러움이(이제 이 친구가 다섯 배쯤 비행기를 타며 내 여권은 손둥동굴보다 깊이 봉인된다) 기분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그냥 그랬던 시절을 지나 우리의 염원이었던 남자아이가 태어난다. 2년이라는 기다림의 결실이었다.


양가 부모님 첫 손주, 사랑과 관심을 풀무질 삼아 우량아 우량주로 백일쯤 컸을 무렵 남편은 첫발을 탕! 쏘아 올렸다.


그 첫 사고를 기점으로 폭력 빼고 거의 모든 것을 했다. 그것도 도미노가 넘어가듯 주기적으로 착실히도 이행했다. 가히 놀라웠다.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어리둥절해 아침마다 진짜 뺨을 꼬집었었다. 만삭까지 거의 쉬어본 적 없는 맞벌이였는데, 그리 열심히도 살던 견고한 내 모래성이 무너지다 못해 트랙터가 부왕 지나가고 포크레인이 퍽퍽 후벼 파기까지 한 것. 피날레로 레미콘차가 오더니 더 쌓지 마시라며 시멘트로 이쁘게 마감질 한다.


대출금 조금 남았던 아파트와 저축은 비트코인과 주식중독의 밑 빠진 독으로, 해외원정유흥 발각, 세컨폰 발각, 수상한 앱 발각, 그에 따른 행적들의 발각 발각 발각... 크~ 화려한 발각의 향연. 콜럼버스의 발견도 이들보다 총천연색은 아닐 것이다. 언젠가 이렇게 글을 쓰게 되면 그 모든 업적을 육하원칙에 맞춰 불특정다수 독자님에게 미주알고주알 일름보 하려 했고 여러분 제가 심장마비로 죽지 않은 것은 기적입니다,라는 마무리 멘트까지 준비했는데 오랜 꿈이 실현되는 순간인 걸까?


와, 영화는 영화일 뿐이 아니라 현실은 킹 오브 킹 시궁창이구나. 막장 대본이 내 인생 돼 버리면 이건 뭐 돌부처 고조할아범이라도 제정신일수 없겠구나. 그런데 헤롱헤롱 정줄 겨우 잡던 내게 더 혹독 한 건 모든 결과물을 입 꾹 닫은 상 마이웨이 남편 대신 혼자 처리해야 했다는 것이다. 플러스 그의 멘탈까지 어르고 달래 주워 담아 다시 출발선에 세워야 했다. 미륵보살급의 마인드 컨트롤. 나의 화장터에는 8할쯤의 확률로 사리가 나오도록 이때부터 세팅되었다. 아들아 부디 잘 수거해 다오. 이렇게 상처 위의 상처를 참아가며 억울해 이만 부득부득 갈던 짠한 과거의 내가 스쳐 지나간다.


더해라 소소야. 이 일름보 타임 얼마나 짜릿하니? 자존심 때문에 남들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내 눈물 젖은 식빵들. 키보드를 거세게 투닥대는 손이 조금 느려졌다. 왜지? 연식 꽤나 먹은 식빵들의 한풀이는 어쩌고? 하지만 참고 산 세월 9년 플러스 이혼 2년 차를 지나게 되니 자서전 한 권쯤은 나올 다이내믹 롤코 인생이지만 세상 모든 결과물이 딱 1인의 행적으로 발동되는 걸까 생각해 본다. 그도 나와 살았던 약 10년의 세월이 쉽지 않았겠지. 피해자 프레임을 쓴 나와 엑스 시댁에서조차 고개 절레절레하는 천하의 가해자가 되어버린 그. 부부로 엮여 늦은 사춘기에 방황을 거듭하는 남편을 더 살뜰히 돌보지 못한 책임이겠거니, 묵힌 식빵 꾸역꾸역 삼켜본다. (대충 일름보 하기도 했고)


여하튼 그 오랜 세월을 답보상태로 견뎌낸 이유는 아들에게는 제대로 하려 했고, 세탁기도 열심히 돌려줬고 조각난 가정을 선물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 하나만 참으면 된다는 아둔한 마음으로 다시 가위질 풀칠해서 도미노 일으켜 세워도 넘어지고 또 넘어지니 결국 백기를 들어버렸다. 완벽한 패배였다.


아니 어쩌면 나의 승리일지도.


이제 더 이상 내 손을 떠난 타인에 의한 물리적 결과물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나에게 속박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가슴 졸이며 살얼음판을 걷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아침마다 눈뜬 게 고역이고 생각하면 눈물 나는 일들로 또 눈물짓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것만으로 이미 이혼은 내게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리고 우당탕탕 택배인생이 시작될 줄 꿈에도 모른 채 어느 날 문득,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머리로만 꿈꾸던 돌싱이 되었다.


이상 이것으로 돌싱타임라인을 마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