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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so Oct 13. 2023

고담시티인 줄 알았는데

이혼 후 택배를 합니다 05

고담시티인 줄 알았는데


am 3시 25분. 강시처럼 번쩍 눈 뜨는 사람?


=나. 알람이 채 울리기도 전 후루룩 깨는 날이 태반이 되었다. 신경이 온통 기상에 있으니 어떨 땐 잤나 안 잤나 헷갈릴 만큼 정신이 반쯤 깨있다. 기민하신 상전을 피해 고양이 뒷걸음질로 세상 고요히 방문 닫고 거실 불을 밝힌다. 부디 오늘은 중간에 깨지 말고 푹 주무소서. 씩씩하게 협조하시는 와중이라 우는 날은 줄었지만 성장기 숙면은 필수불가결이라 애가 쓰인다.


간식거리 좀 꺼내어두고 세수를 하러 간다. 수압이 터져 나오는 구간의 소음을 고려하여 반절만 트는 작업은 여전히 디테일을 요한다. 입술을 모으고 집중해야 할 때. 역시나 오늘도 조절에 실패하고 쏴아- 쏟아져버린다. 혹시 내 눈물이니? 텄네.


작업복이 된 검정 트레이닝 복 걸치고 두꺼운 스포츠 양말 신고 모자 푹 눌러쓰면 대충 끝. 맞다, 가장 중요한 휴대폰은 크로스 끈이 달린 투명 케이스에 매달아야 한다. 사진 찍고 스캔하고 배송완료 처리하고 바쁜데 주머니에 넣었다 빼는 인력을 줄이기 위함이다. 택배의 신 H가 알려준 소중한 꿀팁. (H와는 간식 주거니 받거니 의좋은 형제 놀이를 하고 있다) 초코바 하나를 주머니에 욱여넣으면 이제 마지막 루틴이다. 현관문 나서기 전 확인의 시간. 타임라인을 보면 알겠지만 끝까지 미뤄둔 작업되시겠다.


아 떨려! 일이 제법 베여 익숙해져도 쿠팡플렉스 로그인만큼은 노상 나를 긴장케 한다. 정맥주삿바늘 같은 녀석.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지도를 누르면 배송해야 할 나의 투데이 할당량이 뜨는 데 이게 그렇게 쫄린다. 그도 그럴 것이 택배가 110개 채 안 뜨는 럭키데이는 두 시간이면 끝나 차들이 밀려오기 전에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개 가까이 뜨는 헬데이가 곱절이니 쫄릴 수밖에. 그리되면 세 시간 육박하는 업무를 시간강박과 함께 죽어라 뛰고 퇴근길에 이 동네 모든 차종을 구경하는 프리 모터쇼가 가능하다.


오 저거 신차 나왔다더니 예쁘네. 저분 왼쪽 브레이크 등 나간 거 알고 계실까? 저차는 사막 횡단 하고 왔나.세차하셔야겠어요.


나의 출근길은 유독 일러서 텅텅 빈 아우토반이지만 퇴근길 잘못 물리면 갓반인들 정상 출근과 맞물려 도로에 내리 30분을 갇혀있는 셈. 그러면 S는 슬슬 전화에 부채질을 시작하고 왜 아직도 안 오냐부터 이러다 아침 못 먹냐 늦는 이유가 대체 뭐냐 그리 잔소리를 해댄다. 이제 시어머니 만날 일도 가물었는데 잊지 말라는 건지 배려심 많은 아이가 틀림없다.


헐??? 이게 몇 개야?!!


똥손답게 이런 건 기필코 당첨이다. 후다닥 운동화끼우고 오늘도 예열 없이 시동 걸고 출발. 세상에 가장 안타까운 이가 있다면 첫 번째는 S요, 두 번째는 나 자신, 세 번째는 이 차다. 자는 아이 깨우자마자 달리게 하는 기분이지만 어쩔 수 없다. 후생에는 꼭 여유로운 유저 밑에 태어나 미치도록 예열하고 달리렴. 붕붕아, 넌 나와 함께 이생은 텄어.


배송할 건이 많아 괴로운 와중에도 옆 동네로 넘어가는 출근길은 매일이 새롭다. 이 시간만큼은 누구의 방해도 없어 머리가 선명해진다. 초코바를 씹어 돌리며 당부터 채우고 오늘은 어떤 달이 떴나 눈을 조금 들어본다. 시행착오에 몸뚱이를 끼워가는 나날이지만 여전히 생소한 건 이 시간 이 거리에 내가 있다는 것.


평소 같으면 뒤척이다 하루 중 나름 잠에 든 구간이거나, 슬몃 깨서 몽롱히 또 잠을 청하는 침대 위의 내가 있겠지만 확연히 달라졌다.


이 시간의 거리는 고담시티일 줄 알았다. 출연진 리스트는 N차를 반복하여 대리기사님 불러 귀가하는 가장, 정신 못 차린 오렌지족의 심야 릴레이, 심부름센터의 부지런한 오토바이 정도가 다 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머릿속에 구축된 가상의 이미지 말고 눈에 마주한 리얼 고담시티는 정결하고 아름다웠다.


일단 새벽 미화원들이 그렇게 빨리 활동을 시작하실 줄 몰랐다. 보통 네 시 이전에 나가는데 3교대인지 모르겠지만 미화원 분들은 이미 거리를 청소하고 계신다. 어슴푸레한 새벽녘이라 칭하고 싶지만 그것이 오기 전의 캄캄한 밤. 어제를 정리하는 그들의 정돈된 손길에서 이유 모를 안도감을 느낀다.


드문드문 보이는 차량은 택배차가 대부분. 하얀 트럭들. 나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 누군가의 아침상이 될 양파 감자라던지, 어제보다 서늘해진 대기를 막아줄 카디건, 기다렸던 데이트를 위한 립스틱, 독서 모임을 위한 이달의 책, 내 비타민 딸아이 활력을 더할 착즙 주스 따위가 들어있는 마법의 양탄자. 그 풍경들은 내게 무엇보다 힘이 되었고 하루를 시작하는 힘찬 동력이었다. 더불어 밤을 가르는 멜론 R&B 탑백도.

     

그리고 모든 것을 안다는 듯 가만히 내려보는 평온한 달. 그 아래 내가 있다. 생소하고도 기특하다. 나 역시 하나의 피사체가 되어 그들과 이 순간을 신실하게 살아내고 있음이, 이렇게 포기 않고 오늘 하루도 건강히 뛰고 있음에 감사하다.


내일은 제발, 플리즈, 주여, 부처님, 알라신이여! 딱 100만 물량 뜨는 럭키데이이면 더 감사드리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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