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택배를 합니다 07
사라진 하인즈 케첩을 찾아라
인생만사 새옹택배. 택배인들의 고단한 삶은 택으로 시작해 배로 끝난다. 누구보다 빠르게 정확하게 고객께 전달하는 나는야 배송의 요정, 쿠팡트라는 사명감으로 사랑의 화살대신 구루마달고 달린다. 우리는 경험했다. 사람도 사랑도 사귐도 지칠 때, 날 위로해 주는 건 뭐? say 택배! hohoho! 나 역시 껍데기로 사는 것이 아닐까 싶게 마음이 허할 때, 대문 앞 다소곳이 놓인 노란 상자가 위안을 줬다. 물욕으로 내면을 채울 수는 없지만 그것이라도 필요한 이들에게는 고마운 스트레스 탈출구.
고민하다 주문한 원피스가 뇌피셜에서 오피셜로 딱 맞을 때, 반신반의 산 밀키트가 괜찮은 맛을 낼 때, 오다 전쟁 났는지 한 세기 버틴 해외상품이 도착할 때의 환희를 알기에 배송의 요정은 잠시도 쉴 수 없다.
어느 정도 일이 몸에 익으니 기프트(배송해야 하는 상품)의 생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데드라인이 정해져 있는 새벽배송은 전쟁이다. 시간 안에 200개 가까이 되는 상품을 착오 없이 딜리버리 함은 고도의 집중을 요한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거나 물건이 특정 라인에 몰려있거나 사이즈 김연경 포스 풍기거나 엘리베이터마저 보이콧 한 날이면 속이 바짝바짝 탄다. 중간중간 내놓은 프레시 백까지 수거해야 하니 미칠 노릇.
일이 몸에 배지 않을 땐 시간이 배로 걸리지만, 그건 내 사정이고 택배느님 사정은 네 이놈 때려죽여도 데드라인을 맞추거라이다. (사정이라 쓰고 명령이라 읽음) 그때 약 올리듯 물건마저 말썽을 피운다면? 갓뎀. 택신이여 잘못했나이다. 그냥 곱게 죽여주소서.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건 쌀 10킬로, 뉴케어 30입, 펩시 한 궤짝도 아닌 이름도 귀여운 고양이모래였다. 네모반듯 이쁘게 생긴 그 납닥한 박스를 만만히보고 휙 들어 올렸을 때 허리에서 뻑 소리가 났다.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또 무서운 이름, 그대는 고양이모래. 냥집사들은 집으로 끌어 들일 때의 기가 차는 그 무게감을 아실 테다. 하지만 고양이두부모래보다(차라리 두부손상모래가 어울린다고 생각) 나를 떨게 했던 물건이 있었으니. 웬만하면 오배송 없이 씩씩하게 해내는 편인데 그날의 기억은 몽달귀신만큼 섬찟하다. 다름 아닌... 케첩 한통. 그렇다. 달랑 하나 들은 걔. 풀네임도 까먹지 않고 있다.
‘크래프트 하인즈 케첩’
빨간 마스크보다 징한 시뻘겋고 독한 외국인 녀석.
그날의 악몽이 생생히 떠오른다. 마지막 동 마지막 라인을 칠 때였다. 신선배송이 들어있는 프래시백과 박스들은 구루마에 잘 테트리스 하고 폴리백(비닐) 상품들은 바구니에 적재한 뒤 이것만 무찌르면 끝이다, 룰루랄라 신이 난 나. 꼭대기 층 마지막 비닐 택배를 꺼내는데 공기처럼 홀랑 올라오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뭐지?
입구가 살짝 뜯겨있고 택배 안에 물건이 소리소문 없이 실종된 것이다. 바구니에 실으며 빠진 건가 싶어 1층으로 달려가보았지만 바닥에는 쥐며느리 말고 아무것도 없었다. 당황하여 기사님께 연락하니 비닐팩이 가벼운지라 한 번씩 빠질 수 있다며 다시 잘 살펴보라 했다. 나는 해병대 수색대가 되어 휴대폰 라이트 켜고 온 아파트를 이 잡듯 샅샅이 뒤졌다.
곧 다시 보스에게 무전이 왔고 놈의 정체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간첩보다 무서운 이름, 크래프트 하인즈 케첩. 내 평생 그렇게 간절히 케첩만을 기다린 적은 처음이었을 거다.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고 당장 편의점에 뛰어가 사서라도 넣고 싶었지만 오뚜기 케첩도 아니고 하인즈 케첩이라는데 이 새벽에 코스트코 대문 두드리지 않는 이상 돈으로도 해결 불가. 결국 포기선언을 했고 기사님이 물류센터에서 실어오실 때 빠졌거나 아니면 그전 어딘가의 허브에서 떨궈진 것으로 추측만 할 뿐, 영구 미제 사건으로 수사 종결된다.
그 이후로 당분간 케첩 녀석이 꼴도 보기 싫어졌다가 곧 마트에서 대면하며 괜스레 웃는 내가 있다. 일이란 게 이렇다. 아주 연애 놀음이 따로 없다. 지긋지긋하다가도 때 지나면 입가에 슬몃 추억으로 머무르게 되는 기억의 편린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전한다. 지금은 끔찍스러워도 조금만 존버하면 감자튀김 미친 듯이 찍먹하는 네가 있을 거라고. 그렇게 조금씩 스스로를 단련하고 깎아내며 가지치기하는 거라 슬쩍 응원의 귓속말을 전하고 싶다.
하염없이 걷다 뒤돌아봤을 땐 손톱만큼이나마 자란 내 그림자가 기다리고 있을까? 기다랗게 잘빠진 모양새는 아니라도 단단히 야무진 실루엣의 그것이 마음이 들 것 같다는 설레발을 쳐본다.
내 영혼의 크기를 머금은 그림자가 어딘가로 기울어졌다. 또 이렇게 지난한 하루가 지난다. 성장캐로 스스로에게 각광하고 박수쳐주며 고생한 두 발에 이불 폭삭하게 덮어 준다.
‘소소야. 고생 많았다. 내일도 비 온다는데 X고생 각이지만 일단 나는 잠을 청한다. 미래의 나여, 힘을 내시게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