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택배를 합니다 06
택밴져스
어벤져스 보다 백만 배 막강한 포스를 자랑하는 택밴져스라고 들어보셨는지? 막 생긴 말이라 다소 생소할 테지만 대상에 대입해 보면 와닿을지 모르겠다. 이혼 후 새벽 배송 뛰는 가련한 여자라던가, 쏟아지는 물량에 정줄 놓고 데드라인(새벽 7시) 가리키는 시곗바늘 외면 중인 불쌍한 여자라던가. 그렇다. 어김없이 오늘도 나다.
어벤져스는 지구를 구하지만 택밴져스는 지옥문에서 까꿍~나타나 가만히 내 머리끄덩이를 잡아 올려준다. 가까스로 이생으로 건져질 때 정수리가 시원해지는 그 짜릿한 맛! 쿠팡앱을 새로 고침하는 검지 손가락이 바빠진다. 남아 있는 아파트 동에서 처단해야 할 악당(택배)의 숫자가 히어로(근처 업무를 마친 기사님들) 덕분에 기적처럼 줄어든다. 남은 택배 37개, 21개, 14개.. 쏘 미라클 할렐루야! 각 동마다 드라마틱하게 다운되는 기적의 카운팅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은 옥황상제 테크 탄 구세주가 틀림없단 확신이 든다.
이런 갓 시스템을 어느 가방끈 긴 나리께서 도입하셨나 모르겠지만 인류애 충만하기 그지없다. 기사님께서 택밴져스의 존재를 미리 알려주지 않아서였는지 첫 만남은 리얼 히어로물이 따로 없었다.
처음 딱 하루, 직접 보여주며 알려주고 둘째 날부터 나는 1600여 개 눈이 희번뜩한 대단지 야생에 홀로 던져졌다. 적자생존이 트렌드라 다소 와일드하기 짝이 없지만 어쩔 수 있나? 까라면 까야지. 약 200개의 택배와 어디가 어딘지 낯선 아파트에 덩그마니 남겨질 때 기분은 칼 한 자루 쥐고 무인도에 떨궈진 기분. 나와 비교불가 물량을 몇 번이나 허브에서 나르며 낮밤 갈고 계신 기사님과 H에게 투정 부릴 수도 없는 노릇.
그렇다면? 노빠꾸 직진이다. 어금니 꽉 깨물고 호기롭게 기합 넣지만 역시 나는 확신의 성장캐인가 보다. 솔직히 하루 만에 완벽히 해낼 수 있는 이는 단언컨대 알바신이 아니라 알라신도 불가다. 진짜다. 부처님도 쿠팡플렉스인가 플래시인가 하는 앱에서부터 헤멜 게 뻔하다. 그게 된다면 새벽이랍시고 시커먼데 소등해 버리는 쓸데없이 일 잘하는 경비팀 덕에 심봉사되어 헤멜 게 뻔하고, 전생 올빼미라 그것도 된다면 수많은 택배를 한세월 분류하며 헤멜 게 뻔하다. 이게 다 된다고? 그럼 당신은 스피드에 현혹되어 오.배.송이라는 과오를 남길 것이 뻔하다.
그렇게 손에 익지 않으면 택치 아다다가 될 수밖에 없는 게 이 일이다. 딱 일주일만 헤매면 어느 정도 감이 오긴 한다. 허나 안쓰럽게도 5일 빠지는 이틀차에 대박 물량을 만났고, 7시를 코앞에 두고 약 4개 동 택배가 잔여하게된다. 정신 차리니 먼지가 되어 사라지길 비는 충격적 코마상태의 내가 있었다.
데드라인 지키라 신신당부했기에 내부에는 이미 진도 8의 대지진이 나고 있었다. 이 사단을 어떻게 하지? 혀를 살짝 깨물어볼까? 그때는 조금쯤 늦어도 양해해 주지 않을까라는 꼼수를 왜 생각 못했나 모르겠다. 그냥 7이라는 숫자의 압박이 작아진 앨리스가 바라보는 기이한 광경처럼 거침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이 미션을 완수 못하면 죽는 사람처럼 발 동동 구르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때 다시 내 눈에 뛰어든 타요 눈알 부라리는 흰 트럭. (00 물류 트럭의 전면부에 눈알을 수여한 대표님 미감에 박수를) 제발, 제발, 그들이길! 창문이 열리고 기사님이나 H의 얼굴이 뽀용 등장하길 이제나 저제나 비는데 웬 단발머리 여성분이 고개를 쑥 내민다. 그 절망감은 이루 표현할 수 없다. 인생 마지막 소개팅이 희대의 마기꾼이었던 기억보다 더 하니까. 최후의 보루가 가루가 될 때의 그 심정을 누가 알아주리. 나는 절망한 나머지 무릎이 풀썩 꺾이려고 했다. 그때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그녀의 한마디,
“쿠팡이죠?”
“네? 네네네네.”
탁, 탁 문이 열리고 여성분과 비슷한 또래의 남성분이 그림같이 재빠르게 내리셨다. 부부로 추정되는 그분들은 처단해야 할 악당(물건)들을 빠르고 신속하게 그리고 매우 수려하고 미려한 동작으로 트럭에 켜켜이 적재하고 부붕 출발하셨다.
오늘 내가 죽는다면 사인은 단 하나, 바로 심쿵사. 나는 마음속으로 미쳤다 너무 고맙다 미쳤다 너무 다행이다 이것만 주야장천 번갈아가며 외쳤다. 그렇게 두 분은 마지막 포인트(비를 맞지 않는 적당한 네군데쯤에 물건을 모아준다)에 몸을 사리던 악당들마저 무참히 처단하고 씩 웃어주셨다.
그 미소가 내 눈에는 이병헌 팬미팅 미소보다 눈부시니 어찌 택밴져스가 아니라 할 수 있을까. 미션을 수행하고 다시 트럭에 오르는 등뒤로 후광이 번쩍한다. 살려줘서 고맙다며 수없이 고갯짓 하다 보니 여성분의 걸음이 살짝 불편해 보였다. 그 뒤에도 몇 번의 위기상황에 호흡기 매달러 와주셨는데(이분들 구역이 내 구역과 가깝다) 더없는 구원자시다.
언젠가 택밴져스가 되어 병아리 택찔이들을 도와줄 날을 꿈꾸지만 탑차트럭 없는 일개 하청의 하청 알바 나부랭이는 계속 꿈만 꾸기로 한다. (기사님 핫라인을 통해 지원이 필요한 구역을 공유하는 시스템. 한마디로 내 업무를 실시간 체크하던 우리 기사님이 동아줄을 내려주신 것)
세상에는 많은 영웅이 있고 내게도 잊지 못할 은사님이나 감사한 이들이 있다. 하지만 막막히도 무너지던 그날, 나에게로 성큼 뛰어들던 아우라는 아직도 기억 한편에 선명하다. 소방관이 화마에 뛰어드는 것 같은 두 분의 강렬한 잔상이 어쩐지 꽤 갈 것 같다.
이 다이어리는 찌질하고 나약한 소시민 택배알바의 구원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영웅 족보를 논외 하더라도 그들이 누군들 어떠랴. 그날 두 사람을 간절히 추앙하는 이가 있었음을, 그리고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번쩍 나타나 또 한 번 추앙받기를, 열렬히 응원하고 또 응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