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택배를 합니다 02
투잡 투 워먼
사람은 자신이 고민할 줄 꿈에도 몰랐던 일이 평생의 숙원이 되기도 한단 말을 앞서했다. 내 집 마련과 건강한 부부와 평범한 가정 1타 3피를 세이 굿바이 한 나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돈’이었다. 생활비 때문에 아등바등 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치킨 시켜 먹는 것도 세 번쯤 고민해야 하는 인생 제2막의 오픈. 전남편은 고액연봉자였다. 그래서 빚이 터지기 전에는 생활비 고민을 크게 하지 않았다. 나도 과소비하는 편이 아니었고 맞벌이했으니 따로 여유자금을 모아두는 통장도 있었다.
하지만 이혼 후 전남편은 주식빚으로 개인회생을 시작했고, 나는 약간의 양육비를 받게 되었지만 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는 본업의 수입이 감소하며 필연적으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아야 했다. 월세에 관리비며 각종 보험료, 생활비, 교육비까지 혼자 감당해야 하는 2인의 삶은 각오보다 무거웠다. 그래도 맛있는 간식 하나 더 주고픈 내 작은 돼지를 생각하며 한 발 더 떼야했다.
나는 체계적인 게으름뱅이에 계획형보다는 즉흥형 인간이다. 여기서 체계적인 게으름뱅이란 일을 골든타임까지 미루는 악습관을 말하는 것도 있지만 해야 할 것은 알고 있어서 결심이 서면 실행력을 겸비한다는 뜻이다. 나는 전남편의 사고가 터질 때마다 무언가를 배우고 본업에 관련된 자격증을 땄다. 가만히 있으면 미칠 것 같아 몸을 바쁘게 만든 이유도 있지만 돌싱을 대비해 커리어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때처럼 결심이 섰다.
‘알바를 해야 한다.’
초등 저학년인 아이를 케어해야 하는 퇴근 후 저녁 시간과 일을 하는 낮 시간을 빼면 새벽 말고 선택지는 없었다. 오전에는 등교준비와 작은 집으로 이사 오며 학교가 멀어져 차를 태워줘야 했다. 그러고 나면 아홉 시 이후라 출근 전 바틋한 시간에 딱 맞는 알바자리는 전무후무 수준.
절망했다. 처음에는 시간 맞는 편한 자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던 애송이 시절도 있었다. 그런 일은 멋지고 예쁜데 나만 바라보는 능력을 겸비한 이성같이 유니콘급인줄 모르고 말이다. 서빙이나 캐셔 일이라도 해야겠다 급해지다가 그마저도 시간이 안 맞아 시작조차 못하는 걸 깨닫고 편의점 파트타임을 봤다. 근처는 없기도 했고 밤 12시나 새벽 1시부터 거의 해 뜰 때까지라 중간에 한 번씩 깨기도 하는 아들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파트 상가 편의점에 불쑥 들어가 혹시 새벽 알바 구하지 않냐 묻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면 돌발 상황에 뛰어올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구인광고가 붙은 날 경주마처럼 우다다 뛰어가보니 주간알바였다.
일은 하고 싶은데 뭐라도 시켜주면 잘할 수 있는데. 안 그래도 야박하게 남은 자존감은 고드름처럼 뚝뚝 떨어졌다. 한편으로는 작게 하지만 이 동네에서 나름 선생님 소리를 듣고 있는데 식당이든 편의점이든 학부모라도 마주치면 어쩌지? 우물쭈물하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알아보면 어때서? 열심히 사는 게 죄인가?
난 그동안 남의 시선을 꽤나 의식하고 살았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타인에 관심이 없는데도 숨겨진 치부가 드러나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다. 남편 얘기에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단란한 가정의 엄마이자 아내가 아님을 들킬까 가슴 졸였다. 솔직히 아직도 쿨한 돌밍아웃은 쉽지 않다. 신세한탄이나 타인 의식보다 나를 보는 눈빛이 어떤 이유건 달라짐을 보는 게 아직은 서글퍼서 기다려보기로 했다. 조금만 더 단단해질 때까지. 그래도 일에는 귀천이 없고 지금 사자밥 주는 거 빼고 무엇이든 해야 한단 절실함은 샘솟았다. 그렇게 나는 이 구인광고를 발견한다.
‘아파트 택배배송 구인. 새벽 4:00~6:30 배우려는 의지만 있으면 다 알려드립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배송은 합니다. 일당 4만 원’
나와 같은 출발선에 섰던 사람들이 저만치 멀어진다. 누구는 대장 아파트를 사고 누구는 건물주가 되고 누구는 꿈에 그리던 드림카를 샀다. 나는 10년 전 출발선에서 오히려 한참이나 뒤로 밀려나버렸다. 왜지? 내가 뭘 잘못했지? 답이 없는 물음표를 잡고 악몽 같은 씨름을 했다.
묵묵히 일하고 최선으로 육아하고 시댁에 예쁨 받으려 노력했던 세월이 파도 거품 되어 허망이 가라앉는다. 같이 침몰하려던 나날도 있었다. 베란다에서 두둥실 뜬 달을 퉁퉁 부은 눈으로 바라보다 삶의 굴레에 죽어라 치였는데 이만하면 됐고 뛰어내리면 이 지옥 끝나는 걸까, 되뇌던 날들. 그러다 달무리를 헤치고 문득 얼굴 하나가 떠오른다. S. 사랑하는 내 아들.
나는 부표 하나를 잡았다. 쿠팡이라는 부표인데 택배 배송이란다. 그날 밤 달을 건너 떠오르던 그 얼굴은 통통한 볼살을 자랑하며 내 배에 다리를 척 걸치고 코를 골고 있다.
똥땡아. 엄마 내일부터 택배 한다.
앞으로도 이렇게 깨지 말고 잘 잘 수 있지? 선생님과 택배배달은 가히 괴리감이 있지만 상관없다. 시간도 딱이고 시급도 좋고. 혼자 하는 일이니 지인들 마주칠 일도 덜할 것 같고. 나는 그렇게 투잡을 가지게 되었고 새로운 얼굴을 하나 얻어 투 워먼이 됐다.
무거운 거 들다 여기저기 멍이 들어도, 엘리베이터 오래 잡았다며 욕받이 무녀가 돼도, 장대비가 정수리 뚫을 듯 억수같이 쏟아져도 우산 없이 절대 배송을 원칙으로 하는 잡초 같은 여성. 내 브런치는 이제 마라맛이 될 예정이지만 후회는 없다. 나의 부캐를 만났으니까. 그렇게
이혼 후 택배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