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so Oct 07. 2023

님아 그 말을 꺼내지 마오(feat. 아내)

이혼 후 택배를 합니다 03

님아, 그 말을 꺼내지 마오 (faet. 아내)


공교롭게도 자존심 탓에 강제로 묵혀둔 씨간장 택배썰을 풀자니 친한 언니 불러놓고 치맥 시킨 기분이다. 일단 설레긴 하는데 가까이 보면 예상대로 희비극. 구인광고를 발견하고 처음 든 생각은 매일 새벽 네 시 이전에 일어나 활동할 수 있을까였다.


쫄보는 쫄보를 낳는다고 쫄보 2세를 생성한 마당에 부끄럽지만(놀랍게도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혼자 못 있는다 실랑이가 벌어졌다. 침대에서 여기까지는 물론 열 걸음이 채 되지 않는다. 재우고 써야 한다는 삶의 진리를 얻는다) 난 일단 겁이 많다. 일어나는 것도 일이겠거니와 시커먼 새벽에 온 아파트 단지를 종종거리며 택배 나르는 일을 내가? 설마. 거울 속에 입틀막 하며 고개 젓는 내가 있다. 윗집 냉장고 소리에도 미어캣이 되고 혼자 잠드는 밤은 스탠드로 쌍라이트질을 하는 상겁보 육신이 나다.


그런데 놀라운 법칙을 하나 알려드리고 싶다. 겁과 인생굴곡의 상관관계가 반 그래프라는 것. 내 삶이 하한가 찍게 되면 귀신이 어깨를 붙잡아도 아 어쩌라고, 털어내기 스킬이 가능하다. 그 잔인한 바이오리듬은 에버랜드 사자밥이 아니라 황천랜드 저승사자밥이라도 차려야 하는 비루한 몸에겐 가뿐히 적용. 내가 할 수 있을까는 응 네가 해로 끝난다. 만성 불면증도 있는데 됐네 뭐 하며 구인연락처로 픽미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잊었다. 택배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나를 각성케 해서 당근 알바, 지역 카페 구인광고에 사지멀쩡합니다 이 몸 좀 써주십시오,를 어필하게 했고 문어발 돌쇠 플러팅은 마님들께 대차게 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일과로 바쁜 와중에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00 물류 대표 000입니다. 알바하실 의향 있으신 거죠?

“네?”

-00 아파트인데 가능하시죠?

“네?”

-내일부터 당장 시작하시죠.

“네???!!”


시트콤 같은 플로우지만 사실이다. 성격 급한 대표님의 정글식 구인은 유명하다. 시간이 흘러 연락이 온 걸 보니 누군가를 구인했고 그 누군가가 번개 퇴사를 해버린 모양. 내일 새벽 네 시에 모르는 아파트에서 외계인에 빙의해 얼을 탈 생각하니 당장 예스가 떨어지지 않아 몇 가지 물어봤다. 이 물류회사는 쿠팡맨들이 쳐내지 못하는 업무를 분산하여 담당하는 하청업체쯤 되는 것 같았다. 내차에 물건을 싣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트럭기사님이 내 구역 아파트에 물건을 내려주면 동호수에 맡게 배송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내가 맡은 건 총 16동, 1600세대 아파트였다. 이 많은 세대의 새벽 쿠팡 택배 운명이 이제 내 손에 달린 것이다. 우울했던 서른아홉 번째 생일이 일주일쯤 지난 새벽 네 시,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나는 모르는 아파트에 어리바리 던져졌다. 전날밤 나와 팀이 될 기사님의 쿠팡플렉스라는 앱을 깔아 두라는 지령이 전부. 3시 40분쯤 잠수를 타는 경우가 많은 지 기상 체크와 함께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왔고, 나는 배를 까고 자고 있는 똥땡이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푹 자라 빌고 푸르스름한 새벽의 복판으로 걸어 들어갔다.


무조건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지와 무엇을 어떻게 열심히 하면 되는 건지 의문이 뒤섞이는 찰나 흰 트럭 한 대가 꼬마버스 타요 왕눈알(스티커)을 부라리며 휙 뛰어들었다. 반년이 훨씬 넘은 만남이라 기억의 오류를 감안해도 뛰어들었다 표현은 정확한 편이며, 끽하고 뒷바퀴가 들리듯 만화처럼 뚝 멈췄다. 그도 그럴 것이 택배차의 숙명은 스피드다. 특히 새벽배송은 로켓프레시라는 식자재 마케팅 때문에 7시 이전 마무리를 원칙으로 한다. 물량이 터지는 날 기사님은 하느님 위 고객님을 위해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기적의 레이싱을 뛰어야 한다.


그날이 그런 날이었고 대표님은 본인이 손수 신입 업무를 코칭하겠노라 큰소리치고 음주 후 숲 속 공주만큼 긴 잠에 빠져 드셨고, 기사님이 바쁜 와중에 업무까지 알려줘야 하는(기사님들도 물건을 내려 주신 후, 자신의 구역을 직접 배송한다) 산 넘어 산 헬게이트 데이인 것.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두꺼비처럼 눈만 끔뻑거림으로 기사님을 미치고 파치게 하였으리라. 그런데 우리 기사님이 다행인 점이 하나 있다면 자랑 같지만 자랑이 맞고, 나는 일머리가 있는 편이며 손도 제법 빠르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순간을 얼마나 간절히 염원했던가! 얼 타는 것도 사치고 빨리 일을 습득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쿠팡앱으로 배송물건을 처리하는 법과 완료 사진 찍는 법 등의 팁을 마하의 속도로 흡수하려 씨름했다.


이런 노력이 예뻐 보였는지 내 또래로 보이는 기사님과 그의 세트인 여자분(보통 2인 1조)은 간단한 설명이 끝나고 바쁜 와중에 간식도 주시고 장갑의 엄지 검지 손가락도 직접 잘라주며(핵꿀팁) 초짜 알바생을 살뜰히 챙겨주었다. 그러다 여자분이 나와 동갑이라는 것과  한동네 출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좁은 지역에서 두 다리만 건너면 백퍼 아는 사이란 확신이 들어 더 이상 묻기를 꺼린 건 코미디지만. 그녀는 친근하게 말을 놓자 했고 나는 그게 썩 고마웠다. 그리고 우리의 심리적 거리를 단숨에 좁혀버린 놀라운 공통점.


“괜찮겠어? 남자들도 힘들어서 못한다 하는데. “

“한번 열심히 해볼게. “

“그래. 아들은 지금 아빠랑 자고 있겠네?”


길게 망설인 것 같지만 시간으로 따지면 0.5초쯤 되었을까.


“아니. 혼자 자고 있어. 나 돌아왔거든.”


쿠팡은 대기업답게 대단하다. 본인들은 금시초문이겠지만 또 한 번 나를 단련했다. (쿠팡식 담금질은 이후에도 지속된다) 새벽에 나와 돈 벌겠다고 이러고 있는데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마인드가 발동해 처음으로 돌밍아웃을 편안하게 내뱉고 있는 나. 규칙적인 호흡과 단호한 답변이 지금도 생생히 회기 되는, 간만에 마음에 드는 자아였다.


불면이 오래 지속되어 작년 말쯤 정신과를 찾은 적 있다. 수면제 처방을 받기 위해서였고, 어쩐지 진료실에는 울고 있는 내가 있었다. 그때 나는 잠에 드는 게 너무 힘들고 아이가 불쌍하고 지인들에게 초라하게 돌아온 것을 고백하기 부끄럽다 울었다. 눈물은 버석한 오아시스마냥 진작에 말라버린 줄 알았는데. 항정신성 약물을 처방받고 돌아오는 길의 하늘은 구름 한 점 내지 않고 한없이 푸르고 깊었다. 감춰둔 내 심연의 우울과 같이. 그랬던 내가 인터벌도 없이 돌발 돌밍아웃을? 스스로에게 놀라는 와중에 더 놀라운 답이 돌아왔다.


“어 진짜? 우리도.”


해맑게 웃는 H의 얼굴은 꾸밈없이 말갰다. 마주 보는 기사님 얼굴에도 눈 미소가 피어오른다. 이번에는 반쪽을 제대로 찾은 듯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렇게 H는 16개 동 아파트 절반 이상의 배송을 혼자 씩씩하게 쳐냈고 나는 기사님과 함께 배송을 해보며 일을 익혔다.


어떤 단어가 뇌리에 강렬한 스키드 마크를 남긴 기억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이날 두 글자가 내 전두엽을 파내고 아로새겨졌다.


“이렇게 매일 두 분이서 하시는 건가요?”

“네. 아내가 고생이 많죠.”


다정다감한 표준어를 구사해서 인지, 그의 아내의 말간 미소를 보아서인지, 비슷한 처지라 자아의탁을 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버려진 카테고리로 자리 잡았던 그 단어가 수면 위로 힘차게 차오르는 느낌. 이제는 자격박탈된, 나를 할퀴었던 ‘아내’는 뾰족하게 도사리다 잊힌 줄 알았는데 이토록 부드러운 착지라니.


‘안녕’처럼 태연히 그의 입에서 ‘아내’가 터져 나올 때, 그 아픈 단어를 기쁘게 되찾았음을 그도 의식했을까? 아니면 내 유난한 집착일까.


알 수 없지만 무의식적으로 이런 말을 웅얼거리며 그를 따라 웃는 내가 있었다.


“그래도 좋으시겠어요. “


이전 02화 투잡 투 워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