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꿈꿔왔지만 먼 미래 같던 공간이 내 앞에 놓이게 되었다.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며 살아온 나에겐 지나치게 넓은 공간이었고, 하나부터 열까지 나에 의해 만들어지는 새로운 공간이었다. 시간이 부족해서 꾸미지 못했다는 오랜 핑계도 이젠 가능하지 않다. 나는 지금 실직 상태이고 시간도 충분했다.
이사는 지난 2월에 했다. 포장 이사라 준비할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포장 이사’는 정리가 말끔히 된 집에서 하는 거란 걸 깨달았다. 학교를 떠나며 챙겨온 짐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있고, 이사 간다고 그냥 못 본 척 정리 안 하고 산 덕에 집은 엉망이었다. 그 엉망인 상태로 형태가 완전히 달라진 공간에 맞춰 이사 업체가 정리를 해줄 수는 없었기에 결국 이모님한테 아무 데나 두시라고 했다.
‘제가 나중에 정리할게요.’
그렇게 이사한 이후엔 묵은 때가 묻어있는 가구들과 집기들을 매직 스펀지로 닦고 자리 배치를 했다.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자리 잡고 옮기기를 몇 차례 반복했고, 하다 보니 5년간 망가진 것들이 꽤나 많아서 버리고, 급히 필요한 것들을 새로 사는 일들이 이루어졌다. 버리는 일도, 새로 사는 일도, 정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다른 해였다면 폭풍우가 지나간 듯 학교에 적응하며 정신없는 3월을 보냈겠지만, 올해 나의 3월은 고요했다. 나는 새 학기에 적응이 아닌, 새 삶에 적응을 해야 했다. 하루하루 해야할 학교 일들을 해치우며 바쁘게 보내던 시간들이 아니었다. 학교에서는 어찌어찌 끌려가다보면 어느새 새 학기에 적응을 끝내고 평온한 4월을 맞이했다. 그런데 지금의 새 삶은 내 자유 의지대로 만들어가야 했다. 하루를 온전히 내 뜻대로 만들어가는 낯섦을 경험하고 있었다. 합리적인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여러 다양한 선택지 가운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이라는 '자유 의지'. 그런데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인지 그 자유 의지에 의한 하루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어떤 하루는 반짝 의지에 불타 아침 6시에 눈을 떠, 아침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끄적이고 일자리도 살펴보고 집도 정리했다. 그러나 3일쯤 지나고 나면 갖가지 핑계가 생긴다. 관리사무소에 연락해야지, 몸이 좀 안 좋은 걸, 날씨가 영 좋지 않군. 뭔 핑계가 그리 많은지. 가장 큰 핑계가 컨디션인데. 평소 자신 없는 나의 체력은 작심 3일 만에 방전된다. 학교에선 하루에 처리해야 할 그 수많은 일들을 어떻게 해냈을까 신기할 따름이다. 그때도 체력의 문제는 있었지만 그걸 돌볼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저 견뎠다. 견디다 보면 허리도 아프고 위염도 도지고 몸은 점차 안 좋아지지만, 어찌되었든 일은 끝나 있었다. 죽겠다 노래를 부르면서도 그렇게 해냈다. 그런데 자유 의지에 의한 삶이 시작된 이후로는 몸이 힘들면 쉬었다. 몸이 힘들 때마다 계속 이렇게 쉬어도 되나 불안했다. 대단한 글도 아닌 것을 100세 할머니가 되어서야 '드디어 한편을 다 썼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 전 브런치에 쓴 글이 '테트리스 쌓듯 글을 꾸준히 써나가겠다'는 말이었다. 시간이 훌쩍 흘렀고 그 사이 쓴 글이 없는 걸 보면 이렇게 의지가 박약하다.
최근 읽었던 두 권의 책을 통해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본다.
"난 두려웠어. 대학원만 다니고 상담사는 되지 못할까 봐서 정말 두려웠다고. 근데 아빠는 내가 두려워하는 걸 아셨던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기뻐하시면서도 '거 뭐 될 필요는 없다'라고 하신 거지. 그 말씀을 들으니까 마음이 정말로 편안해지고, 그래 결과야 어찌 되든 한번 해보자고 용기가 솟았어."
-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심윤경 에세이 p.200)
"사람의 가슴 밑에는 깊은 우울의 강이 항시 흐르고 있어서, 멀쩡히 잘 걷다가도 발을 헛디뎌 우울에 빠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작은 벽돌로 둑을 세운다. 우울의 강이 쉽게 범람하지 않도록."
- 나는 계속 글을 쓰게 될 것만 같다(장혜영 산문집 p.250)
두 권의 책은 백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심윤경 작가는 아버지가 했던 '거 뭐 될 필요는 없다'는 말씀에 담긴 것은 '편안함'이라고 했고, 장혜영 작가는 '우울의 강이 쉽게 범람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낙천적인 마음'이라고 했다.
잘 해내야겠다는 압박과 좀 천천히 가면 어떠냐 싶은 해이함 사이에서 예전에 없던 자유를 맛보고 있는 요즘 나에게 제일 필요한 건 이 두 가지인 것 같다. 낙천적인 마음과 편안함.
누군가에게 보여 지는 글이란 생각에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계속 미루기만 해서는 결국 나는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핑계는 줄이고 내 자유 의지로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쓰자. 나를 위해 쓰자. 그러면서도 조급하지 않게 낙천적으로 나아가려 다짐해본다. 나는 편안한 낙천적 인간임을 희망한다.
(실직 또는 또 다른 이유로 잠시 쉬며 불안해하고 있는 누군가에게도 우리 편안해져도 된다고, 조금은 낙천적인간이 되어보자고 위로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