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감상문
※ 소소의 배우자(일명 곰)가 쓴 글로, 소소와 비슷한 듯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적은 글입니다.
※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넷플릭스를 보다가 눈에 띄는 작품이 하나 있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한동안 영화를 관심 있게 보지 않아서 그런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신작을 냈는지도 몰랐다. 은퇴한 줄 알았는데, 2023년에 작품을 만들었다니 안 볼 수 없었다. 그는 할아버지이자 여전히 소년이다. 여운이 길게 남는 작품이라 오랜만에 감상문을 적어보려고 한다.
마히토의 외가 쪽 증조부 시절 내려왔다는 신비로운 돌에서 모든 사건이 시작된다. “귀한 것”이라 지칭되는 이것은 가능성의 총아이며, 하나의 세계다. 또한 새로움의 산실이기도 하다. 이것은 “알”이다.
그 안에서 가능성이 끊임없이 명멸하지만, 고착된 법칙과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본인의 역할에 아무런 의문이 없다. 할 일을 그저 묵묵히 하고, 그 영역을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가능성과 새로움의 산실이지만, 외부와 단절된, 고착된, 발전 없는 세계이기도 하다. 세계의 구성원들은 시스템에 굴복한다. 지겹고 무언가 잘못된 걸 느끼면서도 그런 운명에 순응한다.
알의 아이러니다. 알은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하지만, 그걸 깨부수고 부화하지 못하면 썩어버리고 만다. 안주하는 알은 돌과 다르지 않다.
안주하는 일상은 위태롭지 않다. 안정된 세상 속에 안주하는 이들이 많다.
마히토가 새 세상에 들어와 처음으로 만난 펠리컨 떼는 식욕만 남은 괴물처럼 보인다. 마히토를 잡아먹기 위해 몰려들고, 윗세상으로 올라가 새롭게 태어나려는 와라와라들을 잡아먹는다. 굉장한 악의를 가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뿐이다.
펠리컨은 무거운 먹이를 부리에 많이 담을수록 높이 날 수 없게 된다. 먹이가 없는 바다를 떠나 높이 날아보지만 좀처럼 변하지 않는 현실에 쉽게 먹을 수 있는 와라와라를 잡아먹는데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안정을 찾을수록 나는 법을 잊고, 이 세계에 고착된다. 발버둥 칠수록 깊이 잠기는 이곳은 그들에겐 지옥이다.
그림자 인간들은 죽은 이들이다. 열심히 노를 저어 바다를 떠다니지만, 목적이 없다. 무채색의 인간이다. 그들은 살생하지 않는다. 얼핏 평화롭게 보이지만 그들에게는 각오가 없다. 그저 남이 잡아 온 생선의 살을 구매하며 연명한다. 알맹이 없는 껍데기로 연명한다. 살기 위해 사냥할 각오가 없는 이들. 열심히 노동하지만, 노동의 목적이 없는 그들은 그저 무채색의 그림자일 뿐이다.
앵무새는 가장 중요한 집단이다. 그들은 전체주의를 상징한다.
그들은 체계적으로 무리 지어 생활한다. 군대도 있고, 평화롭게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그림자 인간과는 달리 형형색색의 색을 가지고 있고, 저마다의 개별적인 역할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앵무새 집단 밖을 생각하지 않는다. 앵무새의 번영과 부흥 이외의 다른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파시즘이며, 일제의 전체주의를 표상하는 집단이다.
이들은 반드시 앵무새일 수밖에 없다. 겉보기에 화려하지만 정작 본인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다른 이의 말을 따라 하기 급급하다. 서로의 말을 서로가 따라 하다 보면 말의 본질은 사라진다. 공허한 외침만 남아 개인은 없어진다. 그렇기에 이들은 세상 무해한 얼굴과 눈망울로 앵무새가 아닌 마히토를 요리하기 위해 태연하게 칼을 간다.
파시즘을 다룬 영화 곡성에 이런 대사가 있다. “숨 쉬고 말하고 움직인다고 혀서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여.”
키리코는 현실에서는 다 늙은 몸으로 마히토를 돌보기 위해 힘들게 길을 따른다. 그녀는 알의 세계에서는 젊은 모습을 하고 세상을 돌린다. 물고기를 사냥하여 와라와라에게는 영양가 높고 가시가 없는 알짜배기 내장을 먹여 돌보고, 살생을 할 수 없는 그림자들에게 살을 팔아 그들을 연명하게 한다. 그녀의 늙고 고됨은 그녀가 키워낸 수많은 가능성의 대가다.
히미(히사코)는 불꽃으로 세상을 지킨다. 자신을 태우는 것 같이 보이는 불꽃은 희생을 상징한다. 펠리컨을 쫓기 위해 불꽃을 쏘아 올릴 때 와라와라가 휩쓸리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는 일견 타인을 희생시키는 것 같이 보이지만, 본인의 가능성에 대한 희생이다.
히사코는 병원에서 환자를 위해 일하다가 화재로 죽는다. 이는 히사코 개인의 삶이기도 하지만, 아이를 돌보며 자신의 가능성을 태우는 어머니의 삶이기도 하다.
와라와라는 알이 품고 있는 가능성의 상징이다. 이들은 작고 연약하며 무해하지만 스스로 무엇을 할 줄 모른다. 다른 사람이 챙겨주는 야들야들한 영양가 높은 생선 내장을 먹고 살을 찌우다가 때가 되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승천을 시도를 한다. 펠리컨이라는 시련을 피해 윗세상으로 날아오른다. 연약하지만 새롭게 태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위험 속에 몸을 던진다.
큰할아버지는 알의 세계를 자신의 이상향으로 만들어 유지하고자 한다. 하나하나 쌓아 올린 탑은 최선의 선택을 해 왔다고 생각하지만, 타인이 보기에는 아슬아슬하다. 안정된 세계는 고인 물과 같다. 고인 물은 반드시 썩는다. 본인이 만든 세계를 본인의 자손이 대대손손 이어가길 원하지만, 핏줄이라도 추구하는 이상이 같을 리 없다.
대장 앵무새는 파시즘의 목소리다. 그는 앵무새의 부흥을 꿈꾼다. 세계에서 앵무새가 가장 위대하게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가장 앞장서고,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이상적인 리더다. 앵무새 사이에서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으나, 결국 세계를 파멸로 이끈다. 그는 앵무새 사이에서는 선의의 상징이겠으나 세계의 측면에서 보자면 악의의 총화다. 마히토를 공격하는 그의 명분은 “산실에 들어갔다”는 금기를 범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세계 자체가 하나의 알, 곧 산실이므로 결국 외부인인 마히토를 공격하는 것은 파시스트인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그의 세계에는 앵무새 이외에는 설 곳이 없다. 히틀러도 그의 무리에서는 존경받는 리더였다.
아버지는 좋은 집안에 태어나 군수 사업으로 성공한 재력가다. 자상한 아버지이자 남편이고, 든든한 가장이다. 하지만 그는 일제의 전쟁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충실한 황국 신민으로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그는 전쟁에 이은 화재로 아내를 잃고 이내 아내의 동생과 다시 가정을 이룬다. 하지만 그의 군수공장을 여전히 자랑스러워한다.
마히토는 그런 아버지가 마냥 좋진 않다. 잃은 엄마를 그리워하며 외가에서의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모에서 엄마가 된 새엄마와 군수공장으로 부를 이룬 아버지도 마냥 좋게만 보이지 않는다. 소년은 전쟁을 싫어하지만, 아버지의 공장에서 생산된 전투기의 캐노피를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한다.
나츠코는 언니를 잃고 형부의 아내가 된다. 그녀는 모든 것이 두렵다. 언니를 앗아간 전쟁도 두렵고, 갑자기 엄마가 되어야 하는 상황도 두렵다. 입덧으로 고생하며 갑자기 생긴 꽤나 큰 아들과의 관계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명가의 영애다운 태도로 의연하게 대처해 보지만 깊은 두려움은 점점 그녀를 잠식한다. 결국 몸져누운 그녀는 두려운 세상을 피해 안전한 알 속 세계로 숨는다.
왜가리는 마히토를 알 속 세계로 안내한다. 그는 관계를 상징한다. 처음에는 알 수 없고, 두려운 존재로 마히토에게 다가온다. 마히토를 공격하기도 하고 조롱하기도 한다. 이 세계로 가서는 마히토를 배신하려고 하기도 하고, 마히토에게 공격받아 능력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왜가리는 중요한 순간마다 마히토를 인도하고 구해주기도 한다. 그렇게 얽히고설켜 결국 많은 모험 끝에 친구가 된다.
나츠코는 뱃속 아이도 버거운 판에 갑자기 생긴 꽤나 큰 아들이 부담스럽지만, 좋은 어머니가 되어주고 싶어 한다. 반면 좀처럼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마히토가 밉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을 구하기 위해 힘든 길을 걸어와 마침내 마음을 열어 준 마히토의 손을 잡는다.
마히토는 계속 다가와 주는 새엄마를 밀어내며 미안함을 느낀다. 그녀가 다가올 때마다 기껍게 맞이할 용기를 좀처럼 내지 못한다. 시골의 학교에 가서도 새로운 친구들에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결국 집에 오는 길에 돌멩이로 자해하고 학교를 자퇴한다. 그렇게 집에서 지내며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하려고 할 때, 왜가리가 그를 계속 자극한다. 왜가리와 맞서기 위해 사용인들에게 다가가 여러 가지 지식을 배우면서 타인과의 관계를 만들어가며 성장한다. 그러던 가운데 나츠코가 사라지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용기 내 모험을 시작한다.
관계는 타자를 인식하며 시작된다. 알 속에는 타자가 없다. 알을 깨고 밖으로 나와야 타자를 만날 수 있다. 알을 깨는 과정은 힘들고 두려울 수 있다. 안정적인 세계를 포기하고 혼란하고 어지러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온전히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안쪽에서 알을 긁는 소리가 줄(啐)이고, 밖에서 어미가 그것에 맞춰 함께 쪼아주는 것이 탁(啄)이다. 줄탁이 동시에 일어나야 알이 깨진다.
사람은 함께하는 이들이 있어야 온전히 사람이 된다. 부모, 스승, 친구, 경쟁자와의 관계 속에서 도움을 주고받으며 비로소 사람다워진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도움이 필요한 와라와라가 되는 시기가 있다.
작품의 첫 장면이 주제를 드러낸다. 약자를 돌보는 병원에서 대형 화재가 일어나자, 다들 내 일처럼 온 힘을 다해 진압하려 애쓴다. 사이렌으로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함께 대처한다. 수많은 목조 가옥 사이로 흩날리는 불씨는 금방이라도 불이 번질 것 같은 불안감을 준다. 그렇다. 네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다. 사람은 결국 함께 살아야 한다.
많은 인간 군상이 있다. 살아남기 급급한 펠리컨, 색채를 잃은 그림자 인간, 파시스트 앵무새, 각자 자신의 이상을 위해 살아가는 여러 인물들.
앵무대왕은 오로지 앵무새만 생각하며 세계의 주인이 되려다가 결국 세계를 망가뜨린다. 큰할아버지가 자신의 이상향을 만들기 위해 벽을 쌓은 결과 세계가 병든다.
마히토는 큰할아버지가 만든 세계를 물려받기를 거부한다. 자신이 세계를 물려받는 것이 학교를 가지 않기 위해 새로운 친구, 마음에 들지 않는 친구와 관계를 회피하기 위해 자해한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히토는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여 극복하고자 한다. 자신에게 악의가 있음을 인정하고, 두렵지만 극복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기 위해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아간다. 아버지, 어머니, 세상과의 관계를 이어가려는 다짐이다.
히미는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더라도 마히토의 엄마가 되기 위해 기꺼이 세계를 뛰쳐나간다. 키리코도 히미와 마히토를 돌보기 위해 세계를 떠나고, 나츠코도 비로소 엄마가 되기 위해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간다.
마히코가 열어젖힌 문을 통해 알 밖으로 나온 이들은 비로소 온전한 사람이 된다. 새 때들은 세상에 나와서야 제 모습을 찾는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자전적인 작품을 통해 이야기한다. 이렇게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그렇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