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스탤지어 nostalgia
※ 소소의 배우자(일명 곰)가 쓴 글로, 소소와 비슷한 듯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적은 글입니다.
얼마 전 소소가 푹 빠진 드라마가 있었다. 넷플릭스의 ‘폭싹 속았수다’. 소소가 매주 금요일마다 드라마를 볼 때 나도 같이 앉아 곁눈질로 보다가 끝의 4화는 집중해서 보고 말았다. 극 중 애순의 나이가 내 부모님과 딱 또래다. 제주 태생은 아니시지만 그래서 더 감정 이입이 됐던 것도 있다.
극을 따라가다 보니 애순과 관식의 늙음이 계속 눈에 밟혔다. 내 눈에 비치는 엄마, 아버지는 그렇게 늙지 않았는데, 어느새 칠순을 훌쩍 넘긴 부모님 연세를 생각해 보면 내 눈에만 그렇게 비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도 어느새 사십 대가 됐다.
난 삼십 대 초반까지만 해도 ‘머리 아프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머리가 아파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지럽다는 말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앉았다 일어나면 핑 돈다는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어지러움을 느끼려면 한참을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들을 너무나 잘 안다. 수시로 전방위에서 두통을 느끼기도 하고, 자다가 눈을 떴더니 난 누워있는데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경험도 해 봤다. 이석증이라고 했다. 이제는 잠깐만 쪼그려 앉아 있다가 일어나도 핑 도는 건 너무 당연한 몸이 됐다. 군대에서 제대하고 나름 헬스장을 열심히 다녔던 기억이 있다. 한동안 운동 근처에도 가지 않다가 삼십 대 중반에 헬스장에 가서 예전 기억을 살려 바벨을 들어보려고 했다가 꿈쩍도 하지 않아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요즘은 헬스장에 가도 근력운동은 잘 하지 않는다. 한 번 근력 운동을 하면 심한 근육통이 일주일 이상 지속된다. 거울을 보면 심심치 않게 흰머리가 보인다.
그렇다. 새치가 아니라 흰머리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는 엄마의 흰 머리칼을 하나 뽑아 10원씩 용돈을 받곤 했다. 열 개, 스무 개를 뽑아 백 원, 이백 원씩 용돈을 받아 뽑기를 사 먹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엄마는 흰머리 뽑는 걸로 용돈을 주지 않으셨다.
“엄마 흰머리 다 뽑으면 이제 대머리 된다!”
돌이켜 보면 그때 엄마가 지금의 내 나이쯤 되지 않으셨을까?
장인어른께서는 태블릿 PC로 OTT를 즐겨 보신다. 예전에 소소에게 선물로 줬던 태블릿을 잘 쓰지 않아서 장인어른께 드렸었다. 한참을 잘 사용하시다가 얼마 전에 장인어른께서 도와달라는 요청을 해오셨다. 기기가 제 혼자 꺼졌다 켜졌다 한다고 하셨다. 생각해 보니 구매한 지 7~8년이 되었다. 당장은 기기 초기화를 하고 몇 가지 최적화 설정을 해 드렸지만, 기기가 낡아서 그러니 조만간 바꿔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기기가 낡아서’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았다.
지금 집에서 쓰고 있는 가구 가운데 몇 가지는 꽤 오래된 것들이 있다. 침실의 옷장 같은 경우는 소소가 20대에 샀던 물건으로 자취하던 시절 조금 쓰고 버릴 생각으로 저렴하게 샀던 물건이다. 그 옷장이 벌써 3번의 이사를 따라다니며, 4번째 집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물건은 예의 그 태블릿보다 더 오래된 물건인데, 낡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문득 낡음과 늙음을 구분하는 기준이 궁금해져 사전을 찾았다. 사전에는 낡음은 비생명에 사용하고, 늙음은 생명에게 사용한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사전을 찾아보다 알게 된 사실인데, 낡음과 늙음은 15세기 전까지는 한 단어였다고 한다. 15세기에서야 구분해서 사용하기 시작한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이게 한글의 창제로 좀 더 음을 세밀하게 기록할 수 있게 된 덕인지 진짜 사람들의 언어 사용이 바뀐 것인지는 모르겠다. 현대에 와서는 사물과 생명을 나누어 사용한다고 하는데 뭔가 시원하게 다 설명하지 못하는 느낌이다.
나는 부모님을 보며 늙음을 생각하지만, 거울을 보다가 혹은 생활 속에서 삐걱거리는 몸을 느낄 때마다 낡음을 생각한다. 인천대공원 뒤쪽, 장수동에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수령이 800년이 넘은 나무로 가을이면 온 가지를 노랗게 물들여 늘어뜨린다. 이 나무와 낙엽을 보며 늙음을 생각하지만, 본가 안방에 있는 30년 된 삐걱거리는 원목 이불장을 보며 낡음을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100년 이상 된 유럽산 원목 가구들을 비싸게 주고 사들이기도 한다. 이런 가구를 보통 앤틱가구, 고가구라고 부른다. 이때의 고(古)나 앤틱(antique)은 분명 낡음이 아니라 늙음에 가까운 뜻을 지닌다.
늙음은 현상이며 상태이기도 하다. 누구나, 어느 것이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늙는다. 늙음은 피할 수 없고 피해야 할 것도 아니다. 반면, 낡음은 분류에 가깝다고 느낀다. 탄생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가 낡음을 판별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단지 “그것이 해야 할 기능을 잘하는가?”의 문제다.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것보다 그 기능을 효율적으로 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낡은 것이 된다. 클래식, 고전은 인생의 어느 때에 보고 듣느냐에 따라 늘 새로운 울림을 준다. 그래서 클래식, 고전은 낡지 않는다. 그저 세월이 지날수록 늙을 뿐이다. 우리는 생명에게 낡았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생명을 수단으로, 도구로 사용하는데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낡은 생각은 존재할 수 있지만, 낡은 사람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부모님의 늙음을 보면 가슴 아릿한 울림을 느낀다. 흐드러진 나무를 볼 때, 오래 숙성한 술을 마실 때,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 고전을 읽을 때 저마다 주는 깊은 울림들이 있다. 옛사람들은 오래 사용한 물건에는 신이 깃든다고 믿었다. 설화를 보면 오래 사용한 물건은 도깨비가 된다. 그래서 쓸모를 다한다는 개념이 없었을지 모른다. 닳아 없어지거나, 추운 날을 나게 도와주는 땔감이 되거나, 그도 아니면 신이 되거나.
늙는 것과 낡는 것을 생각한다. 우리는 점점 낡은 것이 많아지는 세상에 사는 것 같다. 하지만 저마다 하나씩은 곁에 두고 이따금 흔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