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s] 그대와 나 사이의 깊은 강

언어의 한계를 넘어 소통하는 일, 그에 대한 결심

by 소소 쌤

※ 소소의 배우자(일명 곰)가 쓴 글로, 소소와 비슷한 듯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적은 글입니다.


나는 어릴 적에 어문 계열을 전공했다. 물론 지금은 문학과 거리가 먼 삶을 사는 중이고, 학생 시절 ‘먹고 대학생’이었던지라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당시 여기저기서 주워들었던 이야기들이 20년이 다 되어가도 문득 기억이 날 때가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말이다. 난 이 말을 처음 들었던 20대에는 그냥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30대를 지나며 그 말은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난 타인과의 논쟁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논쟁은 의견이 다를 경우 일어나고, 보통 그 다른 견해는 대화를 통해 좁혀지지 않는다. 인터넷 커뮤니티가 막 생겨나던 시절 밤새워 댓글을 달아가며 논쟁하기도 했고, 지인과, 가족과, 군대에서, 회사에서, 길거리에서 갈등이 일어났을 경우 시시비비를 따져가며 논쟁해서 상대와 원만하게 합의에 이른 경우는 거의 없다. 예전에는 어느 한쪽이 사과하게 되는 경우에 원만하게 합의됐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좀 생각이 다르다. 요즘은 그런 갈등 상황이 발생하면 그냥 내가 손해 본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웬만하면 그냥 사과하고 넘어가게 된다. 이건 합의가 아니라 봉합이다. 물론 내가 잘못해서 일어나는 갈등 상황이라면 당연히 먼저 사과하는 것이 옳지만, 나보다 상대의 과실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경우라도 상대와 논쟁 상황이 오기 전에 큰 손해가 아니라면 그냥 덮고 넘어가게 된다. 상대와 논쟁한다고 합의에 이를 수 없음을 많은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통해 진실로 상대와 원만하게 합의에 이른 논쟁이 지금까지 얼마나 있었을까? 나의 억울함, 분노, 울분, 슬픔, 논리적 정합성 등을 꺼내어 놓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꺼내어 놓아도 실익이 없다.

“말할 필요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는 게 낫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내뱉는 말은 모두 그렇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언어학에는 랑그와 파롤이라는 말이 있다. 랑그는 언어의 사회적이고 개념적인 면이다. 예컨대 “둥글넓적한 돌 두 개를 포개고, 윗돌에 구멍을 뚫고 손잡이를 달아 뚫린 구멍에 곡식을 넣고 손잡이를 돌려 가는 도구”를 “맷돌”이라고 칭한다. 반면 파롤은 언어의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면이다. 내가 “맷돌”을 이야기할 때 생각하는 것은 외할머니 댁 대청마루 위 쟁반에 올라가 있는, 할머니가 석석 손잡이를 돌려가며 콩을 갈아내시던 맷돌을 생각하겠지만, 요즘 아이들이 “맷돌”을 이야기할 때는 박물관이나 사진, 혹은 영화에서 배우가 “어처구니가 없네?”라고 말하는 장면을 생각할지 모른다. 내가 요즘 아이들과 이야기하며 맷돌을 말할 때는 외할머니 댁의 맷돌을 생각하지만, 상대에게는 랑그로서 맷돌의 개념이 가 닿기를 기대하며 이야기한다. 그리고 상대에게 내가 이야기한 맷돌이 어떻게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상대 역시 듣는 순간 개인의 파롤로서의 맷돌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이야기한 맷돌이 개념으로서, 어떤 물건의 정의로서 잘 전달되었다고 믿는 수밖에 없다.


유명한 사회학 책 가운데 “trust”라는 책이 있다. 그 책에서는 한 국가의 발전과 경쟁력이 그 사회가 지니고 있는 신뢰의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그 신뢰라는 것은 도덕규범, 사회에서 고르게 통용되는 윤리적 가치 등이다. 이를 통해 학연, 지연, 혈연 등 개인적인 연고를 초월해 사회 전체에서 통용되는 규범과 가치로서 신뢰가 형성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은 중(中)신뢰 사회라고 평가된다.


나도 이 평가에 동의한다.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까지 급격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데는 이 신뢰가 작용했다. 단지 그 신뢰가 개인적인 연고를 초월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느 지점이 지나 위태로워졌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정신없이 놀다가 우르르 어느 친구네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끼니때면 집마다 서로 반찬을 나눠 먹기도 했다. 학교 갔다가 왔는데 집 문이 잠겨 있으면, 나는 잘 모르던 옆집, 앞집, 뒷집 아주머니가 불러서 간식을 주시는 일도 흔했다. 버스를 타고 앉아 가다가 내 앞에 무거운 짐을 가진 사람이 서면 망설임 없이 짐을 빼앗아 품고 갔다. 우리 동네, 우리 고향,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신뢰가 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이 시스템의 미비로 지금보다 혈연, 학연, 지연에 의한 부패와 비리는 더 심했을 수 있으나, 그래도 모두가 공유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가치가 있었다. 국가와 민족. 하지만 지금, 아무도 그 가치를 공유하지 않게 되자 우리 사회는 신뢰가 없는 사회가 되었다. 그리고 결과는 분열이다.


지금은 사회적으로 유독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여러 경제 지표들은 박살이 났고, 법과 질서는 혼란스럽다. 여러 매체에 비치는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말들을 내뱉기도 한다. 그들의 파롤과 내 파롤 사이에 랑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같은 말을 쓰지만 결국 같은 말이 아닌 셈이다. 공동체 의식은 간데없고 혐오만이 자라난다.


나는 소소와 이야기할 때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 몇몇 사안들을 알고 있다. 그런 사안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논쟁적으로 되곤 한다. 그럴 때면 소소는 나에게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같은 경험을 나누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시간이 쌓이다 보면 내 파롤이 소소에게 랑그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인 채로 전해지기를 기대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그건 분명히 틀린 생각임을 알면서도 당시에는 답답한 마음과 서운한 마음이 앞서는 경우가 많다.


나는 논쟁을 싫어하지만, 소소와 이야기하다가 논쟁적으로 될 때면 계속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내 생각과 감정이 상대에게 가 닿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한강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을 더욱 두껍게 엮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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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이상한 말들이 난무하는 정치 뉴스 끝에 한강 작가의 신간 소식을 들으며 문득 생각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에 대한 침묵은 피곤하기 싫은 나의 회피가 아닐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강이 흐른다. 내가 띄운 배는 그 강을 따라 상대에게 흘러간다. 배가 상대에게 도착했을지, 혹은 떠날 때 모습 그대로 도착했을지를 보낸 나는 알 수 없다. 그저 나는 잘 도착했으리라 믿고, 다음 배를 띄울 준비를 하는 것이 맞겠다. 확신할 수 없어도 끊임없이 배를 띄워 물길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 나와 상대 사이에 흐르는 강이 시간에 따라 더욱 넓고 깊어질수록 배가 잘 도착할지 걱정은 늘겠으나, 배를 띄우는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질 테다. 역설적인 상황이지만, 그 강의 이름을 신뢰라고 부르면 딱 맞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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