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제따와나 선원의 풍경
사랑하는 폐허들이 있다. 폐허 앞에 서면 감정이 강렬해진다.
‘폐허’ 건물이나 성 따위가 파괴되어 황폐하게 된 터를 의미하는 단어. 폐허를 떠올리면 과거 융성했던 도시를 떠올리게 된다. 반짝이고 아름다웠을 과거가 어떤 아픔의 시간을 거쳐 거친 땅이 되어버린 현재.
‘파괴되었다. 황폐하게 되었다.’ 그런 단어에도 불구하고 폐허는 실패로 느껴지지 않고 아름다움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내가 간직한 아름다운 폐허를 공유하고 싶어졌다.
첫 번째 폐허는 독일 하이델베르크를 여행할 때 마주한 폐허였다. 하이델베르크는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있는 작은 도시였다. 도심 중앙에 작은 강이 흐르고 낮은 산길을 따라 철학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고요한 도시. 그곳에 하이델베르크 고성이 있다. 입구에 들어설 때는 그저 오래된 성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걷다 보면 눈앞에 무너져 내린 거대한 돌탑이 나타난다. 종교 전쟁과 2차 세계대전, 번개 등으로 훼손되어,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채 그대로 보존된 성. 유럽을 뒤흔든 모든 사건의 피해자인 이 성이 그 무게로 무너져 내렸다고 빅토르 위고가 표현한 것처럼, 그 시련의 무게가 느껴지는 풍경이다. 복원에 대한 논의 끝에 일부는 복원되었으나, 일부는 여전히 무너진 상태로 존재하는 폐허. 그 무너진 돌탑 사이에 푸른 풀이 눈에 들어왔었다. 그게 막연한 슬픔으로 느껴져 한참을 그곳에 머물렀던 기억이 난다. 그 성에는 분명 아주 엄청난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화려한 영광의 순간과 무너져 내리던 고통의 순간을 상상했다. 나는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보다 무너진 이 성을 훨씬 좋아했다.
두 번째 사랑하는 폐허는 양주의 폐허, 회암사지이다. 양주 옥정신도시 북쪽 끝에 위치한 회암사지는 입구에 위치한 박물관에서부터 잔디밭이 넓게 펼쳐지고, 그 잔디밭을 가로질러 한참 걸어가면 주춧돌만이 남아 있는 너른 절터를 발견할 수 있다. 고려말부터 조선 전기까지 최대의 왕실 사찰이었다는 회암사지. 엄청난 규모를 상상할 수 있는 그 너른 터가 층층이 올려져 있고, 그 뒤로 산의 능선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그 거대한 터 중심 어딘가에 가만히 서면, 고요하면서도 황량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양주에 살며 때때로 손님이 오면 함께 오게 되는 공간인데,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이 터를 보여주면 다들 좋아한다. 궁궐과 유사한 건축양식으로 지어지고 왕실에서만 사용되던 귀중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는 이 영광의 공간이 흔적만 남아 있음에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감탄을 자아내는 것이다. 참선을 통해 스스로 부처임을 깨닫는 선종 종파의 장소였다는데, 과거에도 지금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깨달음의 공간이 아닐까 생각했다. 최근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등재목록에 선정됐다는 플래카드가 양주 곳곳에 붙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이 폐허가 그냥 폐허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최근 사랑하는 폐허 하나가 더해졌다. 춘천 제따와나 선원. 올해 유독 어찌 살아야 하나 갈피를 잡지 못해 마음이 힘든 나와 곰(나의 남편). 잠시 절에 다녀오자고 출발한 그곳은 차들의 왕래가 거의 없이 한참 산길을 들어간 곳이었다. 고요하게 새소리만 들리는, 산과 작은 논밭으로 둘러싸인 그곳에 갈색 벽돌 건물이 생경하게 서 있었다. 고대 인도에 위치한, 부처님이 가장 많은 안거를 보냈다는 제따와나 선원을 본떠 만든 이곳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수행에 전념하는 공간이라 한다. 관광지처럼 많은 이들이 구경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은 아니다. 사람을 거의 마주치지 못하는 고요한 공간이었다. 해가 만드는 벽돌 그림자, 바람이 만들어내는 꽃의 흔들림, 진한 라일락 향 같은 것들이 있는 공간이었다. 그 자체는 좋았지만 실내에 들어가 절을 할 수도 없고, 생각보다 작은 공간이라 한번 쓱 돌아보고 나니 약간은 허무했다.
나중에 마음 수행을 하러 와보고 싶다 생각하며 돌아가려던 그때, ‘열반당’이라는 공간을 우연히 보고 들어갔다. 벽(그러나 완전히 막히지 않은 뚫린 벽)으로 둘러 싸인 공간에 작은 와불상 하나, 보리수나무 하나, 그리고 단상 뒤 부처님 말씀이 적혀 있었다. 그 공간의 푸릇함과 평화가 좋아 한참 앉아 있다가 깨달았다. 바닥이 망가져 있다는 것. 바닥의 벽돌들이 산산이 부서져 거친 표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바닥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한참 보다가 깨달았다. 그 바닥은 의도된 것이리라. 혹시나 의도된 것이 아니라면 더욱 적절했다. 거친 삶의 풍파에서 찾은 고요가 진짜 고요였다. 그 위에 피어난 꽃이 진정 아름다웠다. 만들어진 폐허였으나, 그 폐허가 주는 감동이 있었다. '형성된 것들은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방일하지 말고 해야 할 바를 모두 성취하라'는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 훌쩍훌쩍 울다가 무언가 해소된 기분으로 그곳을 나설 수 있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곳이 아니라, 폐허는 그곳의 영광이 깃들어 있었다. 상상만 하면 그 위에 근사한 무언가를 세울 수 있었다. 폐허에 앉아 그곳이 폐허임을 잊고 그 상쾌한 공기와 새로 자라난 현재의 잎을 본다. 새소리는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힘차게 지저귄다.
폐허는 마치 나이 드는 일 같다고 느낀다. 최근 ‘어른 김장하’ 다큐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어른 김장하의 얼굴 위에는 주름이 깊었다. 그 깊은 골 위에 눈빛만은 순수하게 빛났다. 생명력이 느껴졌다. 오랜 삶을 살아오며 상처 입으면서도 견뎌낸, 폐허 같은 늙은 몸 위에 꽃이 피어 있다.
나는 때때로 삶이 점차 파괴되어 가는 일처럼 느껴진다. 별 노력 없이 내버려 두는 내 몸은 노화의 흐름 속에서 매일 약해지는 걸 느낀다. 소화도, 시력도, 허리 근육이나 배 근육도 약해진다. 운동도 해야 하고, 식단도 해야 하고, 노화를 막기 위한 관리가 필수인 시대이지만 나는 내 몸을 그리 잘 돌봐주고 있지 않다. 그렇게 시간의 흐름 위에 몸도, 마음도 약해지며 나는 내가 폐허가 되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 폐허는 아름다운 폐허이길 바란다. 내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새긴, 과거의 영광을 무한히 상상할 수 있는 폐허. 그 위에서 새로운 민들레는 피어난다. 초록이 자라고 아직 살아있는 공간, 살아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생은 끝과 시작이 정해져 있으니, 그 안에 내 할 일을 하라는 부처님의 말. 폐허는 삶 속 고통의 흔적이기에 아름다운 공간이며, 나는 그 폐허가 되어감에도 지금 내가 해야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생의 끝에 나의 폐허는 많은 상상을 품은 사랑스러운 공간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