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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 Oct 31. 2020

소주와 보통

안 좋은걸 알면서도 자꾸 취하게 되는 이유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통의 술을 꼽으라면 나의 대답은 소주다. 


기쁘고 반가운 자리에도, 슬픔을 덮고 싶은 자리에도, 아무일 없는 평범한 날에도, 축하할 날에도, 처음 만나는 자리에도, 지겹도록 똑같은 자리에도 무난하게, 폭넓게 찾게 되는 술이니까. 일단 가격이 정말 부담 없고, 맥주, 토닉워터, 과실 원액, 아이스바까지 아무렇게나 섞어도 쓴맛이 부드러워지고, 취하는 줄도 모르고 마시게 되니 한 번 마시면 많이 마시게 된다. 


무엇보다 안주와의 페어링이 비교적 중요한 다른 술들에 비해 덜 까탈스러워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리는 편이다. 스팸에 계란 후라이만 있어도 충분하고, 심지어 파스타와도 잘 어울린다.  


보통 내가 술에 취해 가는 단계가 있다. 각 단계마다 내 감정도 변화한다. 



1단계. 기분이 좋아지고, 말이 많아진다. 별것 아닌 일에도 웃음에 후해진다. 


2단계. 모르는 사이 내가 아니라 술이 술을 먹는다. 정신을 부여잡으려 애쓰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붙잡을 수 없다. 


3단계. 운다. 집에 들어 가면 바닥에 앉거나 누워서 의미없는 말들을 중얼거리거나 또 운다. 다음날 기억이 완전히 삭제된 상태로 깨면 좋겠지만 불행하게도 부끄러운 기억만 남은 채로 지끈지끈한 두통과 함께 깬다. 



1단계에서는 술이 드라이버의 역할을 한다. 온 몸에 단단하게 고정된 나사를 풀어주는, 그래서 내 안에 갇혀 있던 솔직한 내가 나오게 해준다. 뻣뻣한 철벽녀 양철로봇에 기름칠을 해주기도 한다. 


조금 더 유연해지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된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겠지라는 생각 자체를 덜 하게 되니까 평소라면 하지 않을 이야기들이 툭툭 터져 나온다. 그래서 조금은 재미있는 사람이 되는 것 같기도. 


3단계까지 가는 일은 거의 없다. 1~2년에 한 번, 정말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정도. 그리고 3단계까지 갔던 날은 모두 소주를 마신 날이었다. '소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 '내 머릿 속의 지우개'에서 손예진은 "이거 마시면 나랑 사귀는 거다"라는 정우성의 멘트가 끝나기도 전에 비운 소주 한 잔으로 청순 여신의 위치를 공고히 다졌지만 나에게 소주는 뇌가 청순해지는 술일 뿐이다. 


소주 1병을 마시고 뇌가 알콜을 분해하는 데에는 무려 42일이나 걸린다고. 보통 우리가 '술이 깼다'고 생각하는 때는 간이 알콜을 분해한 것 뿐이라고 한다. 혈중 알콜 농도만 되돌아 올 뿐이지, 뇌는 아직 술에서 깨지 않은 상태라는 것. 술을 자주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보니 조금 무서워진다. 자중해야지. 


"내가 또 이렇게 마시면 살구(반려견 이름)다"라고 말하면서도(살구야 미안), 30대 중반에 접어들며 24시간 동안이나 혈관에서 알콜이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느껴질 때 불쾌함을 느끼면서도, 나는 안다. 또 마시게 될 거라는 걸. 


술이 교감신경을 자극하고, 엔도르핀과 세로토닌을 분비시켜 감정을 증폭시키고, 기분을 좋고 편안하게 해준다는 건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장점이니까. 그런 술 중에서도 소주는 참 편안하니까. 평범하게 살기도 참 힘든 세상이지만 '보통'이란 말이 주는 최소한의 안도감이 있다. 


특별하진 않지만 대부분이 속한 평균에 수렴한다는 것, 특별히 좋은 일도 없지만 특별히 나쁜 일도 없는 보통의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 소주는 그저 그런 보통의 날의 옆자리에 두고 싶은 술이다. 영화처럼, 보통이 아닌 사이가 되고 싶은 사람을 옆에 두고 마시면 더할 나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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