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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May 15. 2021

역량 평가

올해 우리 조직에는 역량 평가 제도가 도입됐다. 승진하려면 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5월 첫 주에 교육과 평가 일정이 잡혔다. 걱정도 준비도 없이 응시했다. 국 주무 반장이다 보니, 보고서를 만드는 게 주된 일이다. 매주 글쓰기 수업을 받고, 글도 한 편씩 써서 더 자신 있었다. 예전엔 발표 울렁증이 있었지만 스피치를 배우고, 독서도 하면서 한결 나아졌다. 모든 기운이 ‘합격’을 가리키고 있었다. 동료들도 그러리라고 믿고 있었다.


수업은 온라인으로 이뤄졌다. 대충 씻고, 윗도리만 챙겨 입었다. 집사람이 내려준 커피를 마시며 영상회의 시스템에 접속했다. 화면에는 동기부터, 한집을 썼던 형님, 오랜만에 보는 동료까지 반가운 얼굴이 많았다. 각지에서 모인 20명은 웃고는 있었지만, 살짝 긴장돼 보였다.


첫 수업은 역량 평가의 이해였다. 이 제도는 승진 후보자의 자질을 체계적이고 객관적으로 검증해서 승진의 신뢰성과 공정성을 높이고 공무원에게는 자기 계발 동기를 부여하려고 만들어졌다. 최근에는 여러 부처에서 도입하고 있다. 다음 수업에서는 내일 있을 평가 실습을 했다. 먼저 서류함 기법이였다. 열 쪽짜리 보고서를 보고 한 시간 내에 문제점과 대책을 작성해야 했다. 예상대로 시간 내에 보고서를 작성했다. 나름 만족했다. 평가관은  걸 보면서 질문을 해왔다. 생각보다 평가는 후하지 않았다. 논점을 빗나갔다는 말도 했다. 집사람은 말이 너무 빠르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역할 수행이였다. 제시된 문제를 분석해서, 이해 관계자와 협상하거나 상사에게 보고하는 능력을 측정하는 기법이다. 이번에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교육을 받아보니 합격하는 데는 문제 없을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을 데리고 정읍 집에 갔다. 시험 시간에 맞춰 목포에서 천안까지 가는 게 부담되기도 했고, 돌아오는 토요일이 어버이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오랜만에 손주를 봐서 좋아했다. 다음 날 서둘러야 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두 시에 눈이 떠졌다. 개구리 소리가 요란했다. 만에 하나라도 떨어지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범택시 기사가 운전면허 시험에서 떨어진 꼴이 될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더 눈을 붙이려 했지만 뒤척이다 날이 밝았다. 6시에 집을 나섰다. 딸이 따라가고 싶다고 졸라서 아내도 같이 갔다. 두 시간 넘게 운전해야 했는데, 말동무가 있어 지겹지 않았다.


강의실에는 오전에 평가 받을 열 명이 모였다. 진행 요원은 평가 방법을 설명하고 휴대전화를 걷어 갔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긴장감이었다. 시골집에 있던 우황청심환을 두고 온 게 후회됐다. 진행 요원을 따라 평가장으로 이동했다. 5명이 한 팀을 이뤄 진행했다. 책상에는 필기구와 스톱워치가 놓여있었다. 역할 수행 평가부터 진행됐다. 60분으로 정해진 시간을 누르면서 시험은 시작됐다. 집에서 챙겨온 딸의 형광펜으로 중요한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핵심을 요약해 나갔다. 책을 많이 읽어서인지 정리가 잘됐다. 에이포(A4) 한 페이지에 중요한 내용을 써서 평가가 이뤄지는 방에 들어갔다. 평가관은 50대 중반이 넘어 보이는 남자였다. 당당하고 냉정해 보였다. 질문은 눈매만큼이나 날카로웠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물었다. 답변에 논리가 부족하다고 청문회의 국회의원처럼 추궁하기도 했다. 그래도 잘 정리된 종이가 큰 힘이 됐다.


다음은 자신 있는 서류함 기법 평가였다. 이번에도 한 시간이 주어졌다. 두 문제가 나왔는데, 현황, 문제점, 대책 등 순으로 보고서를 만들었다. 시간도 조금 남았다. 표도 예쁘게 만들고 중요한 문장에는 음영도 넣었다, 출력물을 들고 평가장에 들어갔다. 다른 평가관이었다. 보고서를 잘 만들었다고 칭찬해 줬다. 답변도 논리적으로 잘 된 것 같았다. 평가장을 나서면서 큰 꿈을 꿨다. 적어도 3등 안에는 들 것 같았다. 아내는 김칫국부터 마신다고 했다. 시험을 마치고 병천 순댓국을 먹었다. 긴장이 풀리고 허기져서인지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웠다.


일요일 저녁부터 시험 결과가 궁금했다. 월요일에 출근해서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오전에 연락이 갈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사실 내가 알고 싶은 건 결과보다 순위였다. 몇 시간 지나서 문자가 왔다. 결과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담당자에게 등수를 물었다. 담당자는 손을 펴기 시작했다. 한 손이 아니라 두 손이었다. 거기서 몇 개만 접혔다. 집사람에게는 합격만 했다고 알렸다. 시험이 쉬웠다고 사무실에 말한 게 부끄러웠다. 후배는 "운전면허 시험은 합격만하면 되지 점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위로해 줬다.


며칠 후 중학교 이 학년에 다니는 아들의 중간고사 성적이 나왔다. 아내는 아들을 혼내 주라고 했다. 시험을 못봤으면 반성이라도 해야 하는데, 정신을 못 차린다고 했다. 공부를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실망스러웠다. 역사는 과목 평균 점수보다도 낮았다. 화가 났지만 20명 중에서 중간을 한 내가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닌 것 같았다. 아들에게 ‘시험공부하느라 고생 많았고, 너는 충분히 할 수 있으니 열심히 노력해 보자.’라는 내용으로 긴 문자를 보냈다. 두 시간쯤 지나서 학원을 마친 아들에게 답장이 왔다. ‘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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