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깊은 바다 Dec 04. 2021

나비효과


나비효과
 
25년 전 고등학교 3학년 때 그 선생님의 1분 남짓한 말씀은 내 인생 대부분을 결정했다. 나비의 날갯짓이 폭풍우를 일으킨다는 ‘나비 효과’처럼 말이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나는 면 소재지에 있는 중학교에 다녔다. 농사를 짓는 아버지는 장남인 내게 거는 기대가 컸다. 아들은 커서 넥타이를 매고 일하길 바랐다. 기대와는 달리 수업 중에 책에 만화를 그리거나 먼 산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영어는 기초 문법도 알지 못했고, 수학은 초등학교 때부터 포기했다. 당연히 성적은 바닥이었다.
 
소도시인 정읍은 고등학교에서 필요한 학생보다 중학교 졸업생 수가 적었다. 입시 기간이 되면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중학교를 수시로 드나들었다. 공부 잘하는 애들을 데려가려는 게 가장 컸고, 그다음은 머릿수를 채우는 게 목적이었다. 나는 곁들이로 선생님 눈에 띄었다. 아버지는 내 성적을 알면서도 인문계에 가길 바랐다. 나는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그렇게 누구나 흔쾌히 반겨 주던 선생님의 제자가 됐다.
 
고등학교 1학년 담임도 그 선생님이었다. 국어를 가르쳤는데, 학생들은 ‘백 귀신’이라고 불렀다. 선생님 이름을 뒤에서부터 부르면 그렇게 됐다. 한 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집에 도착하면 바로 잤다. 영어와 수학은 수업을 따라가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국어는 재미있었다. 선생님은 가끔 신문으로 수업했다. 그때부터 한겨레신문을 꼼꼼히 읽는 습관이 생겼다. 수능 모의고사를 보면 다른 과목과는 달리 국어 성적은 조금 잘 나왔다.
 
2학년에 올라갈 무렵, 선생님은 다시 중학교에 내려갔다. 동네 후배가 선생님 눈에 들었다. 선생님은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후배 집에 같이 찾아갔다. 후배 부모님은 공부를 잘하고 성실한 내가 있어서 안심하고 보낼 수 있겠다고 했다. 내 신세가 처량했다. 이러다가는 어느 대학도 들어갈 수 없는 내 처지와 장학금을 받는 후배가 비교됐기 때문이다. 남은 2년은 최선을 다해 보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시내 독서실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2월이라서 독서실은 싸늘한 기운이 가득했다. 우연히 관리인이 친구의 누나여서 좋은 자리를 내줬다. 문제집 여러 권도 샀다. 그때부터 독서대 밑에서 자는 서너 시간씩 자면서 독하게 공부했다. 3학년 무렵에는 조금만 더하면 지방 4년대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너무 일찍 포기해 버린 영어와 수학이었다. 그 과목들은 막고 품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수능이 몇 달 남지 않았던 어느 날 그 선생님의 국어 시간이었다. 수업 중에 콕 찍어서 ‘목포해양대학교’에도 관심을 둬 보라고 말씀하셨다. 원래 바다에 관심이 많았을뿐더러 군대도 가지 않고, 해외여행도 할 수 있다니 이보다 좋을 순 없을 것 같았다. 성적을 조금만 올리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그렇게 나는 목포에서 대학을 다녔다.
 
20대 중반에 망망대해를 몇 달씩 떠다니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그립기도 하다. 찻잔에 남긴 홍차처럼 잔잔했던 적도 바다를 보고, 고래와 날치 떼까지 만났던 일은 배를 타지 않았다면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경력으로 아버지가 원하던 직업까지 얻게 됐다. 거기다가 목포에서 아내를 만났고 가정까지 이뤘다.

몇 년 전, 나는 몇몇 친구와 신귀백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학교를 그만두고 익산에서 다양한 문학 활동을 하고 있었다. 술을 따라 드리며, 선생님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드렸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선생님의 수업 시간에 딴생각을 하고 있었더라면 나는 지금 무엇이 돼 있을까? 선생님의 사소한 말씀 한마디는 학생의 인생도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날갯짓’이지 않나 싶다.


작가의 이전글 치안 대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