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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May 25. 2022

알레르기는 괴로워

알레르기는 괴로워


약 33년 전, 여름이라 해도 무색하지 않을 오월의 어느 날이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면 소재지에 있었다. 주변에는 집보다 논밭이 더 많았다. 학교 울타리는 20년 가까이 자란 큰 나무가 둘러싸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창밖으로 함박눈이 내리는 것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가끔 민들레 홀씨 같은 것들이 날리긴 했지만 이런 적은 없었다. 선생님은 눈병에 걸릴 수 있으니 될 수 있으면 나가지 말라고 했다. 그 가벼운 충고를 30년 넘게 기억하게 될지 그때는 미처 몰랐다.

점심시간인데도, 운동장은 한산했다. 동전 크기만 한 하얀 솜털이 달린 꽃가루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그것들은 고요한 날 내리는 눈처럼 우리들의 공간을 떠다니고 있었다. 바람은 미루나무에 조각구름을 걸어 놓을 뿐만 아니라, 꽃가루도 퍼트린다는 것을 그때서야 제대로 알았다.


다음 날 아침, 눈이 가려웠다. 거울을 보니 눈에 거미줄 같은 핏줄이 쳐져 있었다. ‘재수 없게 하필 나야!’라고 불운을 탓하며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눈을 크게 벌리고 세심하게 관찰했다. 진단은 빨리, 쉽게 내려졌다. 옆에 놓인 여러 안약 중 하나를 골라 넣으며, 알레르기라고 했다. 꽃가루가 눈에 들어와 면역 반응을 일으켰다며 주사 한 대 맞고, 약을 잘 챙겨 먹으라고 했다. 2~3일 지나자, 눈은 가렵지 않았고, 원래처럼 맑은 눈으로 돌아왔다. 한 달 지나자 내 눈은 또 붉게 타올랐다. 그리고 지금까지 봄이나 환절기가 되면 나를 괴롭힌다.


사실, 몇 가지 좋은 점도 있었다. 내가 다닌 대학은 모든 학생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다. 유행병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독감이나 눈병은 사감이 가장 경계하는 질병이다. 유행성 눈병이 돌면, 몇몇 친구는 자유를 누리려고 눈을 비벼댔다. 그리고는 누가 더 빨간지 비교해 가며 낄낄댔다. 아무리 해도 나를 따를 사람은 없었다. 사감실에 들르면 사감은 대충 한번 살펴보고 나를 피했다. 잘 치료받고 오라는 허락을 받고, 병원에 다녀왔다. 그 시간을 제외하고 2~3일은 친구 자취방에서 푹 쉬다 올 수 있었다. 회사에서도 가끔 열심히 일한다는 오해를 받았다. 국장님이나, 과장님은 내 충혈된 눈을 보며 요즘 일이 많아서 피곤하냐고 격려해 주곤 했다. 그럴 때면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물론 안 좋은 점이 몇 배는 많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눈이 간지러워진다. 눈이 뻑뻑해서 쉽게 피로해진다. 자면서 나도 모르게 눈을 비벼 아침이 되면 눈이 퉁퉁 부을 때도 있다. 당연히 수면의 질도 안 좋아진다. 회사 동료들은 또 술 마셨냐고 묻기도 한다. 이 시기가 되면 알레르기 환자가 많아서 병원에서 한 시간 넘게 대기하기도 한다. 병을 낫게 하려고 여러 노력도 했다.


아버지는 눈 때문에 집에 자주 오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한의학 대학병원에 가보자고 했다. 안과에 몇 년째 다녀도 그때뿐이니 한의학 치료를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뉴스에서 알레르기는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걸 본 기억이 났다. 체질과 한의학은 묘하게 연결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름 방학 기간 한 달 넘게 정읍과 전주를 오가며 침을 맞고, 보약을 먹었다. 그리고 보름쯤 지나자 눈이 또 가려웠다. 알레르기 완치법을 개발하면 노벨의학상을 받는다는 기사를 먼저 봤어야 했다.


잠시 희망이 보이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배를 탈 때였다. 배는 주로 한국과 미국, 남미 등을 오갔다. 배에서 알레르기가 돋으면 치료도 할 수 없어서 걱정됐다. 그런데 삼 년 넘게 증세가 나타나지 않았다. 혼자 원인을 분석해 봤다. 집과는 음식을 다르게 먹고, 환경도 바뀌어서 체질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체질을 바꾸는 데는 물이 중요한데, 배에서는 바닷물을 증발시켜 쓰기 때문일 것 같았다. 배에서 내려 첫봄을 맞았다. 나는 또 안과에 앉아 있었다. 내 체질이 바뀐 게 아니라 태평양에는 꽃가루가 없었던 것이다.


아내는 알레르기 검사를 해 보자고 했다.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요인들이 많아서 정확히 알아야 대처할 수 있다고 했다. 검사를 하고 며칠 지나서 보고서가 왔다. 아내는 결과를 보더니 한마디 했다. “대충 살자”라고 말이다. 결과 보고서에는 꽃가루부터 집먼지진드기, 양파까지 수십 가지의 반응 물질이 나왔다. 그 항목들을 피하는 방법은 하나일 것 같았다. 다시 배를 타는 것이다.


요즘도 알레르기 때문에 고생한다. 그래도 터득한 방법이 있긴 하다. 병원은 월요일, 그중에서도 오전은 피한다. 환자가 많이 몰리기 때문이다. 처방받을 때는 안약을 두 개씩 달라고 한다. 세 개까지 주라고 하면 눈에 좋지 않다고 꺼려 한다. 단골 병원을 만들면 의사 선생님이 알아서 챙겨 준다. 눈약은 개봉하면 한 달까지만 쓰고 버린다. 스테로이드 약을 쓰면 안압이 오르기 때문에 녹내장이 생길 수도 있다고 한다. 실비 보험을 들었다면 치료 비용도 받을 수 있다. 외출할 때는 고글이나 선글라스를 쓰면 증상이 나타나는 걸 줄일 수 있다. 마스크까지 쓰면 더 효과적이다.


삼십 년 넘게 알레르기 환자로 잔인한 봄을 보내고 있다. 사람들의 눈을 관심 있게 보는 습관도 생겼다. 눈이 맑은 사람을 보면 부럽다. 충혈된 사람을 보면 동병상련을 느낀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느낀 알레르기 치료법은 꽃가루를 피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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