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 저녁, 뉴스로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다. 우리나라 선수가 금메달을 땄을 때 느껴지는 애국심, 그 이상의 감정으로 가슴이 뭉클했다. 나는 문학에 조예가 깊지 않다. 작가를 잘 알지도 못한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한강이 쓴 <<채식주의자>>를 읽어 보려 했었다. 2016년 어느 날이었다. 장인어른은 그 책을 들고 우리 집에 왔다. 한강이 세계 3대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보고 서점에서 샀다고 했다. 아내는 얼마 전, 책을 많이 버리고, 책장을 다시 정리했다. 그 책은 다행히 내 눈에 더 잘 띄는 데 꽂혔다. 다 읽긴 했지만,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기억에 남아 있는 거라곤 작가의 이름과 책 제목뿐이었다. 나는 책장에서 그 책을 집어 들었다.
10월 11일 아침,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에 많은 국민이 기뻐했다. 갈등과 부정으로 가득 찬 차갑고 어두운 세상에 비추는 한줄기 햇볕 같았다. 가장 기뻐한 사람은 한강의 아버지인 한승원 작가 같았다. 유튜브로 그의 인터뷰를 봤다. 그는 정제된 언어와 표정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아버지의 딸을 사랑하는 마음은 더 고귀하고, 깊게 느껴졌다. 한승원 작가는 “자신과 한강의 소설을 비견해 보면 한강의 소설은 하나도 버릴 게 없으며, 하나하나 다 명작들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슴도치처럼 내 새끼만 예쁘다고 그런 것만은 아니다”라는 말도 보탰다.
10월 11일 11시, 내게도 한승원 작가만큼이나 가슴 뛸 일이 예정돼 있었다. 아내는 며칠 전 아들의 담임선생님에게 전화를 받았다. 장학금 수여식이 있는데, 아들은 시험 기간이어서 부모님이 꼭 참석해야 한다고 했다. 오지 않으면 장학금을 주지 않을 거라는 주최 측의 기분 좋은 거짓말도 전했다. 행사 장소는 목포 엠비시(MBC) 컨퍼런스홀이었다. 아내가 준 정보는 거기까지였다. 아내도 그 이상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내는 내게 갈 수 있냐고 물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학교 다닐 때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장학금을 아들 대신이라도 받아 보고 싶었다. 나는 고급스럽고, 세련된 정장을 꺼냈다. 와이셔츠도 가장 흰색으로 골랐다. 거울을 보며 머리와 옷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새벽 출근길의 공기는 유난히 상쾌했다.
회사에서 외출을 끊었다. 입이 간지러웠지만, 직원들에게는 볼일이 있다고만 했다. 차를 타고 행사장으로 가면서 기분 좋은 음악을 들었다. 어떤 시상식일지 추측도 해 보았다. 방송국 강당을 빌릴 정도면 꽤 큰 단체일 것 같았다. '인사말을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살짝 고민도 했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 여러 명과 함께 행사장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행사장에는 사회를 준비하는 방송국 아나운서와 영상을 찍는 카메라 기자가 보였다. 관계자들은 진행 사항을 점검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중앙의 큰 화면에는 '재단법인 홍재장학문화재단 제25기 장학생 장학 증서 수여식'이라고 쓰여 있었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아보았다. 고 권이담 전 목포시장이 재임 기간 받은 봉급 전액을 기증해 설립한 재단이었다. 지역에서는 권위 있는 재단으로 얼핏 들어본 기억이 났다. 올해부터는 목포 엠비시와 협약을 맺어 수여식을 공동 개최한다고 했다. 행사 관계자에게 아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하고 학부모 자리에 앉았다. 목포 지역 고등학교 2학년 45명이 장학금을 받는다. 많은 학교가 시험 기간이어서 절반 가까이는 학생 대신 온 학부모였다. 나는 혹시나 아는 사람이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대했지만, 모두 초면이었다. 우리의 공통점은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 모두가 이 순간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국민의례를 마치고, 재단 이사장과 방송국 사장이 인사말을 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은 인사말에도 등장했다. 장학금을 받은 아이들이 한강처럼 국민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어른으로 자라 주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장학금 수여식이 진행됐다. 아들 고등학교는 첫 번째로 호명되었다. 아들 이름이 첫 번째로 불렸다. 다른 세 명의 이름이 더 불렸다. 네 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학부모가 참석한 학교는 단상에서 상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사회자는 참석자들에게 박수를 부탁한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내 옆자리 학부모는 나에게 주원이 아빠냐고 물었다. 아들과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는 친구의 엄마였다. 아들에게 룸메이트 성격이 좋아서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분의 얼굴을 보고, 말투를 들어 보니 왜 그런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이대로 행사장을 떠나기 아쉬웠는지, 한 학부모가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나는 생애 최초로 장학금 수여식에 참석했고, 아들의 장학 증서를 들고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한승원 작가는 딸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기념으로 동네 사람에게 한턱내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에게 한강은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나서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마을 잔치를 하냐고 말했단다. 나도 직원들에게 작게나마 한턱내고 싶었다. 회사에 가는 길에 카페에 들렀다. 두 손으로 커피 열 잔을 들었다. 직원들에게 커피를 돌렸다. 직원들에게는 그냥 오는 길에 사 왔다고 웃어넘겼다. 내 자리에 앉아 시원한 커피를 들이켰다. 커피는 어느 때보다 맛있었다. 얼음이 다 녹기 전까지 시상식의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날 저녁 집에 온 아들은 시무룩했다. 수학 시험에서 문제 하나의 답을 잘못 마킹했다고 했다. 그래서 수학 내신이 한 등급으로 밀렸다고 했다. 아들은 기말고사에서 올릴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했다. 일요일 저녁, 평소 같았으면 기숙사에 가는 시간이었다. 아들은 집에서 자고 싶다고 했다. 아내도 그러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감 선생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얼마 후 사감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같은 반 아이들이 전부 기숙사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전화했다고 했다. 수학을 가르치는 사감 선생님은 주원이가 이번에 정말 열심히 했는데, 그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아서 아쉽다고 했다. 그러면서 "주원이 같은 아이가 사회에서 정말 잘 돼야 하는데요."라고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꼭 고슴도치처럼 내 새끼만 예쁘다고 그런 것만은 아니다. 아들은 장학금이 나오면, 친가와 외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10만 원씩 드리고 싶다고 했다.
10월 14일 월요일 아침, 사무실 계장님이 금요일 저녁 목포 엠비시 뉴스에서 나를 봤다고 했다. 나는 웃으며 "아! 그러셨어요."라고 말했다. 그 뉴스 때문에 아내에게 핀잔을 들은 터였다. 계장님은 웃으며 아내와 비슷한 말을 했다. "계장님은 그 중요한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으면 어떡해요." 그러게 말이다. 한승원 작가처럼 좀 더 고상하고 품격있게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채식주의자>>라도 들고 있을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