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첫 번째 일요일 아침, 제주 가는 배를 탔다. 시원한 바람에 일렁이는 은빛 억새, 따사로운 햇볕을 받은 황금빛 귤, 청명한 하늘을 담아 검푸른 바다! 깊어지는 가을을 느끼려는 게 이번 여행의 이유였다. 일정은 따로 짜지 않았다. 마음 내키고, 발길 닿는 대로 가자고 했다. 아내는 오랜만에 배를 타서인지 설레 보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7층까지 있는 큰 배에는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깨끗했고, 편의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우리는 밖이 잘 보이는 의자에 앉았다. 여덟 시 45분, 출항 시간이 다가왔다. 바깥은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로 자욱했다. 곧 짙은 안개 때문에 출항이 지연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안개는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사라졌고, 멀리 유달산 기슭이 어른어른 모습을 드러냈다.
아홉 시쯤 여객선은 부두에 멘 밧줄을 풀었다. 기적을 서너 번 울리며, 바다로 항해했다. 아내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목포항을 바라봤다. 배의 선수로는 목포대교, 오른편으로는 해양대학교가 보였다. 25년 전, 나는 이 학교에 다녔다. 졸업하고는 군대에 가는 대신 화물선을 탔다. 그러면서 20대의 절반을 바다에서 보냈다. 상선 회사를 그만두고 한참 지나서까지 다시 배를 타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그때는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선원은 거친 바다뿐만 아니라 외로움과도 싸워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학교를 보면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다. 그래서 모교라고 하나 보다.
목포항 입구 등대를 벗어날 무렵, 가방에서 전자책을 꺼냈다. 어제 내려받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였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10월 한 달 동안, 한강의 책에 빠져 살았다. 그녀는 글을 시처럼 썼다. 이번 여행에서, 색다른 의미를 얻고 싶었다. 이 책을 읽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배는 진도의 여러 섬을 뒤로하고 망망대해로 들어섰다. 두 시간쯤 책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은 주인공 경하를 따라 제주에 있는 친구 인선의 집으로 걷고 있었다. 그곳의 커다란 느티나무와 건천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 시골 마을은 실제 존재하는 곳 같았다. 거기에 가보고 싶었다. 인터넷을 검색했지만, 정보는 없었다. 한강은 이 소설을 ‘죽음에서 삶으로 가는 소설, 절반 죽어 있던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소설, 바다 아래에서 촛불을 켜는 소설.’이라고 했다.
날이 추워지면서 허리 디스크 통증이 더 심해졌다. 오래 앉아 있으면 더 그렇다. 아내에게 객실에 누워 있겠다고 말했다. 그곳은 불이 꺼져 어두웠다. 이미 많은 사람이 잠들어 있었다. 나도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배의 기관실 진동이 등으로 느껴졌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젊은 시절 배를 타던 추억이 그려졌다. 이제는 그리운 기억이 됐다. 그러면서 한 친구의 얼굴이 그려졌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죽음이 그를 불러온 게 분명했다.
20년 전 어느 날이었다. 대학교 때 반 대표였던 호중이에게 연락이 왔다. "제주에 갈 수 있니? 정무 형에게 연락이 왔는데, 정무가 죽었대." 정무는 여러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대학을 졸업하고 배를 타고 있었다. 연가 기간에 형의 일을 돕다가 사고가 났다고 했다. 안타깝긴 했지만, 나는 완곡하게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초임 시절이라 회사를 이틀이나 빼는 게 쉽지 않았다. 목포에서 배를 타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졸업하고 나서 3년 넘게 연락 한 번 안 했던 것도 이유였다. 젊은 시절이라 죽음이라는 게 나와는 상관없는 단어 같았다. 지금 그 전화를 받았더라면, 배를 탔을 가능성이 훨씬 컸을 것이다.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올 스테이션 올 스탠바이 (All station All standby, 선원 정위치)”라는 입항을 준비하는 안내 방송에 눈을 떴다. 역조류 때문에 예상 도착 시간보다 한 시간 늦어져, 다섯 시간이 걸렸다. 멀리 한라산이 보였다.
렌터카를 빌려 4일간 머무를 표선읍 근처 회사 수련원으로 향했다. 주변에 밭과 동산만 있고, 차도 많이 다니지 않아 조용하게 머물기 좋은 데다. 그날 여행할 곳은 아침에 정했다. 둘이 인터넷을 검색해서 추천하는 방식이었다. 아내가 따라비오름 어떠냐고 물었다. 처음 듣는 데였다. 하늘은 당장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비구름이 가득했다. 어제와는 다르게 바람도 옷깃을 여미게 불었다. 숙소에서 오름까지는 차로 10분쯤 걸렸다. 월요일 아침이라 도로는 더 한적했다. 오름 가는 길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비포장 도로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이정표를 보고 올라갈 방향을 정했다. 평일 이른 아침이어서 오름은 더 고즈넉했다. 억새는 바람이 불고, 날씨가 흐려야 더 예쁜 것 같다. 너울대는 억새의 은빛 물결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아내는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으며 신나 했다. 정상에서 보는 풍경은 더 놀라웠다. 멀리 표선 바다와 한라산이 보였다. 정상의 의자에 앉아 넓은 밭에 심어진 초록색 야채와 푸른 숲, 은빛 억새, 커다란 풍력 발전기를 보고 있자니 모든 근심이 사라졌다. 이래서 사람들은 가을에 제주의 오름을 찾나 보다.
다음 날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어제 살짝 내린 비 때문에 하늘은 더 푸르렀다. 서귀포 여행지를 가던 중에 한 동네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귤밭이 너무 예뻐서 잠깐 둘러보자고 했다. 귤은 따사로운 햇볕을 받아 황금빛이 났다. 과일이라기보다는 활짝 핀 꽃 같았다. 동네 어귀부터 주렁주렁 귤이 열린 귤밭이 마음의 풍요로움을 더했다. 마을을 끼고 흐르는 천은 한강이 묘사한 것처럼 물이 말라 있었다. 커다란 느티나무를 보며 이곳이 그곳이 아닐지 상상해 보기도 했다. 관광지도 아니고 유명한 곳도 아니지만, 가을에 제주에 온다면 꼭 들러 보고 싶다.
3박 4일 동안 아내와 나는 오랜만에 둘만의 여행을 즐겼다. 아무런 계획 없이 떠났지만, 돌아올 때의 감흥은 어떤 여행보다 컸다. 제주의 멋진 풍경을 즐길 수 있었던 카페, 표선의 검푸른 바다를 보며 먹었던 광어회와 담백하면서 깔끔했던 고기국수 같은 먹거리. 제주 가을 여행의 매력에 푹 빠졌다.
11월 6일 수요일 네 시 45분, 우리를 태운 배는 목포로 출항했다. 구름 때문에 일몰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곧 배에도 어둠이 내렸다. 나는 객실에 누워서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진도 군도에 들어설 무렵, 아내를 데리고 선미로 갔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손을 잡고 가장 어두운 데로 갔다. 아내와 함께 머리에 무릎 담요를 둘러썼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가을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유난히 빛이 나는 별을 나는 집중해서 바라봤다.
불빛이 반짝이는 목포대교를 아슬아슬하게 지날 때, 아내는 탄성을 질렀다. 나는 해양대학교 기숙사를 바라봤다. 방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 기강이 군대와 비슷하다고 했다. 1학년 점호 때는 기합도 자주 받았다. 제주에서 목포로 오는 여객선이 기숙사 앞을 지날 때면, 선배의 불호령도 거의 끝날 시간이었다. 그때 불이 환하게 켜진 배는 너무 멋있었다. 나도 저런 배를 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지금 나는 그 배에서 기숙사를 바라보고 있다. 그때 정무는 제주 고향 이야기를 자주 들려줬다. 자기 집에는 귤나무가 있고, 배를 타고 오는 이야기도 했던 것 같다. 서로 배를 타면서 연락이 끊겼지만, 학교에 다닐 때는 마음이 통하는 친구였다. 그래서 호중이도 나에게 연락을 했을 것이다. 나는 정무와 작별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여행하면서 더 미안했고 그리웠던 것 같다. 가을 제주 여행은 나에게 행복뿐만 아니라 그리움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