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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Oct 01. 2019

제복의 추억

2019. 5. 25.


목포에 살다 보니 해양대학 후배들을 자주 본다. 날씨가 더워지면 흰색 정복 때문에 더 눈에 띈다. 딸에게 아빠도 저렇게 학교를 다녔다고 자랑한다. 딸의 "와!" 하는 탄성에 25년 전 그 옷을 입은 것처럼 우쭐해진다.

해양대학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대학 소개서에 나온 정복 입은 선배들 사진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옷만 입으면 여자 친구가 생길 것 같았다. 실제 많은 친구들이 그 덕분에 연애했다. 제복을 입으려면 과정이 필요했다. 애벌레가 여러 번의 탈피를 거쳐 흰나비가 되는 것과 같다.

첫 동정복 검열을 받는 게 가장 힘들다. 고등학생 티를 벗지 못하고, 군대 같은 분위기도 적응되지 않은 데다 검사도 더 까다롭다. 구두 닦기와 다림질도 처음인 동기들이 많았다. 서로 도와 가며 준비해야 한다. 자매 분대(해양대에 있는 친목모임) 선배들은 방법을 알려 준다. 구두는 구두약과 침을 골고루 묻힌 후 부드러운 천으로 수십 번 문지른다. 불광 기술을 가진 친구는 여기저기 불려 다닌다. 광이 나서 얼굴이 보일 정도다. 옷은 파리가 앉으면 몸통이 베일 수 있을 만큼 다린다.

시간이 되면 우리는 복도에 일렬로 선다. 종교 의식처럼 엄숙하다. 지도대 선배들의 지적에 여기저기서 '시정하겠습니다'라는 함성이 들린다. 긴장감과 공포심이 공존한다. 이 과정을 통과해야만 정복 입을 자격이 주어진다. 자매 분대 선배들은 이 날을 기념해 통닭과 순대로 다과회를 열어 준다.

주말 외출에도 노력이 많이 필요했다. 나가고 들어오면서 복장 검사를 받는다. 독사와 같은 선배를 만나면 외출이 늦어지거나 체력 단련을 해야 한다. 행동도 제약이 따른다. 저학년은 더 그렇다. 목포 시내는 통행금지 시간 이후에 다닐 수 없다. 길거리에서 음식을 먹는 것, 애인과 팔짱을 끼는 것, 짝다리 짚는 것과 같은 품위를 해치는 행동이 다 금지된다. 흰색 정복을 입으면 짬뽕은 기피 음식이 된다. 옷이 구겨져도 안돼서 기차나 버스에서도 긴장해야 한다. 몰래 사복을 입거나 만취해서 비틀거리는 일탈이 선배들에게 걸리면 동기들은 옥상에서 빛나는 별을 봐야 했다.

제복은 승선 생활에 필요한 세 가지를 갖추게 했다. 첫 번째는 절제다. 선원들은 고립된 공간에서 장기간 공동체 생활을 한다. 청결과 엄격한 자기 관리가 습관화되어야 한다. 전염병이라도 생기면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 술도 정도를 지키며 마셔야 한다. 바다에 빠지면 구조도 어렵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위계질서다. 선상 반란의 결과는 참혹하다. 1996년 선원 11명이 살해된 페스카마 15호 사건이 그 예다. 선장 권한은 막강하다. 사법 경찰관으로 선내 안전을 해치는 행위에 대한 강제조치권, 선내 사망자에 대한 수장권과 같은 것이다. 제복은 선후배의 구분을 확실하게 한다. 선배는 지시를 내릴 수 있고 후배는 따라야 한다. 비합리적이어도 그렇다. 그래서 명령과 결정은 더 신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책임감이다. 세월호 선장은 승객을 배에 놔둔 채 팬티만 입고 탈출했다. 만약 제복을 입었다면 직업의식과 소명감을 그리 쉽게 침몰시키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계절이 바뀌어 여름옷을 준비한다. 25년 전 익힌 기술 때문에 다림질은 항상 내 차지다. 와이셔츠와 바지 여러 벌을 어렵지 않게 다려 낸다. 그때 추억은 흐릿해졌다. 하지만 몸은 기억한다. 제복 입던 그 시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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