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깊은 바다 Oct 01. 2019

아방이의 암

2019. 9. 14.



암에 걸렸단다. 몇 달 전부터 암갈색 자국이 보이긴 했다. 너무 소홀했다. 요즘 자전거로 출퇴근하니 더 그랬다. 아니 핑계다. 원래부터 무감각했는지 모른다. 공업사에 다녀온 아내가 화를 냈다. 정비사가 "남편은 뭐하는 분이길래 이렇게 방치했어요?"라고 물었단다. 녹은 암과 같아 초기에 없애야 한다면서 말이다. 털털하고 꼼꼼하지 못한 성격 탓에 차는 항상 지저분했다. 생각해 보니 참 미안한 일이다. 아내에게도 아방이에게도.

첫 차에 대한 감정은 첫사랑만큼이나 특별하다. 설렘과 두려움, 애틋함이 공존한다. 첫사랑의 기억은 흐릿해진 반면 28살에 200만 원을 주고 산 세피아와의 추억은 또렷하다. 배를 내리고 지금 다니는 직장에 들어갔다. 출장도 가고 연애도 하려면 차가 필요했다. 운전 경험이 없다 보니 8년쯤 된 중고차를 선택했다. 시골 친구 차였는데, 승차감도 좋았고 팔 계획도 있다고 하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차가 있다는 것은 방이 생기거나 손전화를 갖는 느낌과는 달랐다. 뇌 신호가 손과 발을 통해 전달되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몸의 기능을 확장시킨 것과 같았다. 또 다른 세상이 열리는 것이기도 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축소되어 활동 공간이 넓어진다.

열쇠를 받자마자 시디플레이어부터 달았다. 음악을 들으며 운전하니 진짜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두 손으로 운전대를 꽉 잡고 정읍에서 목포까지 고속도로 이차선만을 고집하며 달렸다. 집사람은 첫 만남에서 연극이 끝난 후 차 문을 열어주는 매너에 호감이 생겼다고 했다. 연극은 공짜표가 생겨서 본 것이고 문은 그럴 수밖에 없어서 열어준 것인데 말이다. 차는 5년쯤 후부터 잔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비 오는 날엔 운행 중에 멈추는 아찔한 일도 자주 일어났다. 아내를 연결시켜준 세피아는 결국 30만 원에 폐차장으로 향했다.

두 번째 차는 아방이라고 애칭을 붙인 아반떼다. 2년 된 중고차였는데, 13년 된 차를 몰던 내게는 새 차나 다름없었다. 진한 파란색 계기판은 황홀하기까지 했다. 흠집이라도 생길까 걱정하고 이 주에 한 번 세차한 적도 있었다. 10년이 된 지금까지 속을 썩인 일도 없었다. 발령을 받아 혼자 눈물을 삼키며 인천으로 올라간 날도 함께했다. 아방이의 녹은 나를 따라 바닷가 근처를 오가며 생긴 세월의 흔적이다. 시간은 감각을 무디게 한다. 세차는 언제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흠집은 너무 많아 관심 밖이 됐다. 아이들과 부모님이 타도 충분했던 공간은 이제 비좁다. 아방이가 작아진 것이 아니라 아이가 커진 것을 차가 좁아졌다고 불평한다. 이별을 할 시간이 다가온 것일까?

흔히 차종에 따라 재력을 상상하고 운전습관으로 운전자의 인품과 성격을 평가한다. 더러운 차를 보면 그 주인도 왠지 그럴 것 같다. 차는 단지 애용품이 아니라 나를 투영하고 있는 몸의 일부일지도 모르겠다. 추석에 아방이의 녹을 사포로 긁어내고 라카를 뿌렸다. 암갈색 흔적은 지워졌지만 주변으로 도료가 흘러 눈물자국이 생겼다. 그 걸 보던 집사람이 한마디 한다. "오빠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작가의 이전글 조정래 작가님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