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오는 것과 같았다. 여러 조건이 갖춰지니 금방 커졌다. 제주에서 근무하는 후배가 열기를 높였다. 관사에서 자면 되고 안내도 해 준단다. 하늘도 쾌청할뿐더러 날씨도 이보다 좋을 순 없다. 동료는 혼자라도 가겠다며 배표를 끊었다. 승선권 매진 임박 소식에 괜스레 급해진다. 마지막 관문은 집사람이다. 주말에 남자끼리 산에 간다면 좋은 말은 안 나오겠다 했는데, 조심히 잘 다녀오란다. 내 마음속 제1호 태풍 '한라산'은 그렇게 생성됐다.
토요일(19.10.19.) 0시 30분, 목포에서 산타루치노를 탔다. 2만 4천 톤급 여객선답게 웅장하다. 20대 때 상선을 타서 인지 고향에 온 것처럼 포근하다. 객실에 짐을 놓고 맥주부터 샀다. 한 잔 마시고 누우면 도착할 것 같았다. 착각이었다. 엔진의 작은 소리와 미세한 진동까지 거슬렸다. 잠들기 전 커피를 마신 것처럼 몽롱했다. 노루잠을 자서인지 몸은 지뿌둥했다. 6시가 되어서 배는 제주에 입항했다.
목포, 제주를 운행하는 산타루치노
마중 나온 후배는 산을 타려면 속이 든든해야 한다며 해장국집으로 데려갔다. 뱃속에 따뜻한 국물과 선지가 들어가니 피곤이 가신다. 한 그릇 다 비우자 자기 사무실 화장실로 안내했다. 등산하려면 속이 편해야 하니 비우고 오란다. 채우자마자 비우는 것이 형이상학적이다.
아침 선지해장국
후배는 계획을 설명했다. 관음사로 올라가 성판악으로 내려온단다. 총 19킬로미터에 9시간 반이 걸린다. 벌써 7시 40분인데 둘은 느긋하다. 그 이유를 알기까지 오랜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주차장에서 김밥 한 줄, 물 세 통, 삶은 달걀, 사과, 연양갱, 초콜릿바, 에너지바 하나씩을 나눴다. 정상에 가면 춥다는 장인어른의 말에 내복까지 입었다. 등산 스틱에 등산화도 있으니 대비가 잘된 것 같아 만족스럽다.
관음사 탕방로 입구
탐방로 입구 높이는 해발 620미터다. 약 1300미터를 더 올라가야 한다. 탐라계곡까지 3.2킬로미터는 잔잔한 등산로다. 용암이 흘렀을 현무암 계곡은 검은색 정장을 입은 도시 남자처럼 쌀쌀맞다. 계곡물은 간간히 모여 있을 뿐 흐르지 않아 단조롭다. 초록색 비단 이끼를 두른 한아름 난대림만이 이방인을 반긴다. 동행자는 풍경에는 관심 없다는 듯 질주한다. 등산인지 경보인지 헷갈린다. 그러고 보니 후배는 철인 3종 경기에 나갈 만큼 몸 관리가 철저했다. 동료도 배드민턴을 매일 쳤다. 나도 등산을 자주 하지만 배불뚝이 40대 직장인이다. 동년배지만 군살 없는 몸매가 증명하듯 체력은 비교가 안됐다.
현무암 계곡
곳곳에 안내판이 내 위치와 산행 난이도를 가르쳐 준다. 쉬운 길은 초록색, 보통 길은 노란색, 어려운 길은 빨간색으로 표시된다. 이제부터 초록색은 없다. 탐라계곡 목교에서 개미등까지 2.8킬로미터는 빨간색 '깔딱 고개'다. 숨이 차 온다. 해발 1200미터부터 풍경은 안중에 없다. 잡념도 사라진다. 오로지 두 가지 생각뿐이다. 오르느냐, 포기하느냐다. 잘 다녀오라던 아내와 아이들이 떠오른다. 혼자라면 그만두고 싶지만 동행자가 있다. 여기서 멈추면 두고두고 놀림 받을 것 같다. 아직도 해발 750미터가 남았다. 후배는 나를 불쌍히 쳐다본다. 이제부터 나보고 앞장서란다. 둘의 빠른 박자에 맞추다 보니 제풀에 지친 것이다. 등산 스틱이 고맙다. 두 발로 걷는 게 아니라 네 발로 긴다. 내복 입기에 아직은 이른 날씨다. 온몸이 땀범벅이다.
관음사 탐방로 안내도
안내판에는 3시간 40분 걸린다는 삼각봉 대피소(해발 1500미터)를 2시간 10분 만에 도착했다. 잠시 쉬기로 했다. 내복부터 벗었다. 묵은 때를 벗겨 낸 듯 가볍다. 쉬려고 앉는데 왼쪽 발에 쥐가 났다. 계속 주물러대니 풀렸지만 더 심해지면 큰일이다. 물로 목을 축이고 에너지바와 사과를 먹으니 살 것 같다. 둘은 쌩쌩하다. 얄미우면서도 함께해줘 고맙다. 여기서 포기하면 미안할 것 같다. 다행인 것은 용진각 현수교까지 약 1킬로미터는 노란색이다. 계속 다그치는 것이 미안해서 주는 사탕 같다. 경치도 눈에 들어온다. 단풍이 예뻐 사진도 찍어 본다. 현수교 앞 샘터 물은 시원하고 달콤했다. 지나고 보니 물 한 통 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삼각봉 휴게소에서 휴식
마지막 2.7킬로미터는 또 빨간색이다. 여기만 지나면 된다. 왼쪽 발이 살짝 저려온다. 한 걸음이 천만 근이다. 아침 일찍 서둘렀던 사람들은 벌써 하산한다. 격려받고 싶어 하산자에게 얼마나 남았냐고 물었는데, 아직 멀었다는 냉정한 답이 돌아온다. 조금 더 올라가니 책에서 보던 고사목이 보인다. 영롱한 파란 하늘 밑에 검푸른 바다가 있고 그 안에 하얀 구름이 있다. 한라산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이제 고지가 보인다.
해발 1800미터쯤
11시, 대한민국 최고 높은 곳 1950미터에 올랐다. 백록담을 보며 집사람에게 영상 전화를 했다. 큰 일을 해낸 가장의 위엄을 보여 주고 싶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니체는 "행복이란 힘이 증가되고 있다는 느낌, 저항을 초극했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더 높고 힘든 산에 오를수록 만족감이 커지는 이유다. 동료와 후배는 내가 대단하다고 했다. 포기할 것 같더니 끝까지 왔다며 말이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내가 대견해'
성판악으로 내려오는 길 반대편에는 '인간 개미'들이 줄지어 올라온다. 외국인도 많았다. 이들에게 목표는 동일하다. 며칠 전 읽었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한 구절이 떠올랐다. 매일 그곳에 모여 싸움만 하는 분들끼리 한라산에 올라보면 어떨까? -------------------------------------------------------------------------------- 우주에서 본 지구는 쥐면 부서질 것만 같은 창백한 푸른 점일 뿐이다. 지구는 극단적 형태의 민족 우월주의, 우스꽝스러운 종교적 광신, 맹목적이고 유치한 국가주의 등이 발붙일 곳이 결코 아니다. 별들의 요새와 보루에서 내려다본 지구는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작디작은 푸른 반점일 뿐이다. 이렇게 여행은 시야를 활짝 열어 준다. (칼 세이건, 홍승수 옮김, <<코스모스>>, 사이언스북스, 2017, 632쪽) ----------------------------------------
줄 지어오던 등산객
성판악 하산길 풍경
하산 길은 단조로웠다. 뜨거운 희열을 식힐 여유를 주는 것 같았다. 큰 돌맹이들 때문에 발바닥이 아팠지만 참을 만했다. 까마귀 울음소리마저 정겨웠다. 한바탕 큰 태풍이 지나가고 이제 잔잔해졌다.
성판악 등산길 안내도
여행의 마무리로 고생한 내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사우나에 가서 몸을 풀고 능이 오리백숙을 먹었다. 반주는 '한라산'이었다. 술자리에서도 내 얘기는 빠지지 않았다. 내 걱정이 많이 되긴 했나 보다. 한라산은 체력뿐 아니라 자신감을 갖게 해줬다. 동료들과 소중한 추억도 선사했다. 니체가 말한 '행복'을 느끼고, 칼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도 보려면 이만 한 곳이 없다. '한라산'은 소멸됐지만 강력했던 가을 태풍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