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세종 출장을 마치고 목포로 가는 기차를 탔다. 창가에 앉아 햇빛 때문에 내려놓은 커튼을 반쯤 올렸다. 6시가 넘어서인지 태양은 이미 기운을 잃고 있었다. 익산을 지나면서 창밖 풍경을 더 눈여겨본다. 첫사랑처럼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내 고향 정읍을 지나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역에서 8킬로미터쯤 떨어진 시골에 산다. 아버지는 내가 한 살 때 이 집터로 이사 왔다. 나도 목포로 대학을 가기 전까지는 여기서 자랐다. 뇌 과학자 김대식에 따르면 “인간은 뇌가 미완성인 채로 태어나는데, 약 10년간 신경 세포가 완성된다. 고향이 편한 이유는 어려서 경험한 음식, 소리, 얼굴과 풍경 등이 뇌를 만드는 요소여서 그렇다.”라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고향이 생각나고 옛집이 그리워지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는 것 같다.
내가 어려서 살던 집은 슬레이트 지붕을 얻은 흙집이었다. 오래돼서인지 벽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천장에서 쥐들은 요란한 술래잡기를 했다. 방은 두 개였지만 하나라고 해도 무방했다. 어린 마음에도 동네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는 게 싫었다. 고등학교나 대학교 때는 더 그랬다. 부모님과 사 남매는 한방에서 뒤엉켜 잤다. 아버지는 새벽에 일어나면 방에서 담배부터 피웠다. 연기는 독하면서도 구수했다. 상쾌한 아침 공기와 섞어 마시면 어지럽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방에서는 피지 않았다. 아버지 덕분에 나는 평생 금연을 실천했는지도 모르겠다.
외양간도 있었다. 소는 두 마리쯤 키웠다. 소똥 때문에 냄새도 나고 파리도 많았다. 부모님은 송아지를 팔면 목돈이 생겼지만 나는 그게 싫었다. 생이별하는 어미소가 이틀 가량은 목이 쉬도록 울어서다. 그날은 차라리 학교로 도망가고 싶어졌다. 그 터를 보면 가끔 암소의 눈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래도 집터는 좋았다. 아버지는 항상 큰 인물이 태어날 만한 곳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풍수지리를 잘 보는 사람도 그랬다고 강조했다. 국가직 말단 공무원이 된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는 그 예견이 맞았다고 할 것이다.
뒤안에는 장독대가 있고 주변에는 누가 심었는지 모를 빨간 맨드라미가 매년 피었다. 대밭과 작은 숲이 어우러져 있어 이때쯤이면 낮에는 뻐꾸기, 저녁에는 소쩍새가 울었다. 아버지는 자라나 가물치를 잡아 오면 옛날 펌프로 지하수를 퍼 올려 빨간 고무 대야에 담아 놓았다. 가족에게 먹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팔아서 살림에 보탰다. 한편에는 아이 한 아름만 한 상수리나무도 있었다. 어머니에게는 묵, 내게는 장난감이 나오는 나무였다. 6월쯤 되면 수액이 나오는 곳에 어김없이 사슴벌레가 있었다. 산이 옆에 있어서인지 잡아도 그 다음날이면 또 있었다. 보물 나무 같았다. 지금도 산책을 하다 비슷한 나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가끔은 사슴벌레를 잡기도 한다. 우리 아이들은 곤충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어릴 적 추억을 잡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옆 뜰에는 아버지가 이사 와서 심은 감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닭이 처음 낳은 달걀만 한 크기의 감이 열렸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여섯 식구가 겨우내 먹을 만큼 열리곤 했다. 할머니는 비바람에 떨어진 파란 땡감을 주워 우렸다. 배고픈 시절이라서 그런지 먹을 만했다. 요즘 시골 홍시는 대부분 새들 차지지만 그때는 빨간 기운만 보여도 무섭게 따 먹었었다.
나무로 된 마루는 낮잠 자기 딱 좋은 곳이었다. 한여름에도 시원했다. 자다가 가끔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아프지 않았다. 누워서 제비집을 보는 것도 재밌었다. 5월쯤 되면 제비가 처마 밑에 집을 짓고 6월 초순쯤 되면 새끼가 태어났다. 작은 흙집에 모여 살며 재잘대는 새끼들에게 열심히 먹이를 나르는 어미를 보면 우리 가족의 삶과 비슷했다. 제비들이 집을 떠나 때쯤이면 집 주위를 빙글빙글 요란스럽게 돈다. 어머니는 고마워서 그런단다. 제비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25살,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널 때 옛집은 허물어졌다. 그 때 상수리나무와 감나무도 베어졌다. 집 상태도 안 좋아졌고 자녀들 시집과 장가를 보내야 하니 결단이 필요했던 듯했다. 부모님은 빨간 양옥집을 지어 살고 계신다. 빈집이 된 앞집까지 사서 마당으로 만들었다. 시골집은 이제 동네에서 가장 넓은 집이 됐다.
아버지는 올해 74세가 되셨다. 몇 년 전까지 이장을 했다. 이젠 노인 회장이다. 마을은 한때 삼사십 집이 넘었지만, 지금은 열 집쯤 남았다. 그리고 계속 줄어들고 있다. 언젠가는 내가 이 집을 지켜야 할지 모르겠다. 여섯 식구의 추억이 담긴 집과 터를 팔아 버린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 집사람에게 퇴직하면 정읍에서 살거라고하니 흔쾌히 그러라고 한다. 대신 혼자 가서 살란다. 어떻게 하면 고향집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