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육개장
어쩌면 어머니는 나보다 더 설렜는지 모른다. 그날은 17년 전 장마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부모님께 여자 친구를 소개하는 날이었다. 10시쯤 목포를 출발해 한 시간 만에 고향집에 도착했다. 집으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내 가슴은 더 두근댔다.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그녀는 시청 공무원이던 아버지와 옷 가게를 하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시골집이나 평생 햇볕에 그을린 남자 친구의 부모님이 어색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어머니는 풍채만큼이나 손이 크고, 요리를 잘하기로 유명했다. 식사 때가 되면 이웃 할머니들은 우리 집으로 마실을 왔다. 어머니는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숟가락을 내주곤 했다. 닭이라도 한 마리 잡는 날이면 우리 집은 동네 사랑방이 됐다. 어려서는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 식구 먹을 것도 부족해서다. 나누면 더 배부르다는 어머니의 지혜를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알게 됐다.
부모님은 여자 친구를 보자마자 합격자를 정한 면접관처럼 웃었다. 어머니는 첫눈에 내 식구라는 느낌이 왔다고 했다. 부모님의 직업과 건강을 묻는 상투적인 질문이 끝나자 점심이 차려졌다. 돼지갈비에 잡채, 계란말이까지 한 상 가득이었다. 마지막으로 육개장이 나왔다. 김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여자 친구는 땀을 흘려 가며 연신 불어 댔다. 맵다 싶으면 물 대신 머위 들깨탕을 먹었다. 처음 먹어 본다며 “맛있다.”를 반복했다. 그 탄성의 횟수와 크기만큼 어머니에게 받는 점수는 올라갔을 것이다. 내가 먹고 자란 음식을 맛있어 하던 그녀와 나는 그해 가을 한식구가 됐다.
어머니는 목포에 놀러 올 때면 육개장을 양동이에 한가득 담아 오곤 했다. 아내가 둘째를 유산하자 안쓰러워서, 새 아파트에 동료들을 초대하면 기뻐서 그랬다. 나는 어머니가 육개장을 김치찌개처럼 쉽게 만들 줄만 알았다. 그날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육개장을 만들려면 정성은 물론이고 재료도 많이 들어간다. 어머니는 대부분 직접 마련했다. 봄이 되면 고사리부터 꺾었다. 그때쯤에는 농사도 한가해서 운동 삼아 다니면 재미있다고 했다. 가끔은 알을 품던 까투리의 날개 짓과 똬리 튼 뱀에 놀라기도 한다. 덤불도 헤쳐 나가야 한다. 가시에도 찔린다. 고사리의 부드러운 솜털의 촉감과 톡 끊어지는 소리는 모든 걸 잊게 했다. 그래서 다시 찾는다. 반나절쯤 열심히 돌아다니면 가방이 꽉 찬다. 고사리는 독성이 강해서 잘 삶아야 한다. 하루 이틀쯤 햇볕과 봄바람에 잘 말린다.
늦여름이 되면 고구마순과 토란대를 구했다. 주로 텃밭에 심었다. 반찬거리가 없고 입맛도 떨어지는 때라서 이만한 식재료가 없었다. 잘 익은 고구마순 김치는 양푼에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벼 먹으면 그만이었고 토란 죽은 힘을 내는 데 최고였다. 팔아 봤자 푼돈이어서 먹을 만큼 먹고 남으면 잘 말려서 냉장고에 보관했다.
어머니는 육개장을 하려고 마음먹으면 아버지에게 쇠고기 양지를 부탁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최고의 부위라고 자랑했다. 특히나 맛있게 끓여지면 고기를 잘 사 온 덕으로 돌렸다. 양지는 두 시간 푹 삶아 잘게 찢었다. 육수는 국물을 내는 데 썼다. 고사리와 고구마순, 토란대는 마음 내키는 대로 가득 넣는다. 파도 마찬가지다. 건더기가 팔 할은 된다. 마지막으로 애증의 고춧가루를 넣으면 얼큰하고 칼칼한 여름 보양식 한 그릇이 완성된다. 한여름을 나려고 보신탕을 드시던 아버지도 어느 때부터인가는 개고기를 꺼려했다. 농사를 줄이면서 여름 나기는 육개장으로도 충분했는지 모르겠다.
그 일은 불볕더위로 온열 환자가 속출하다는 뉴스가 나오던 날 일어났다. 주말에 찾은 시골집에 인기척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에 여러 번 전화를 걸어 연결된 어머니는 목이 메어 “아파서 잠깐 병원에 왔다.”라고 말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급하게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어머니에게 뇌졸중이 왔다고 했다. 조금만 빨리 왔어도 완치가 가능했을 거란 말도 빼놓지 않았다. 어머니는 하루 전부터 몸이 이상했다고 했다. 아버지에게는 더 이상 일하기 힘들다는 말도 했다. 아버지는 며칠 후에 비가 올지 모른다며 고추 따기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따라나섰던 어머니는 안 되겠던지 혼자 버스를 타고 1시간이나 걸리는 시내 병원에 갔다. 거기서 이런 결과를 들었으니 어머니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버지께 왜 그렇게 무심하냐고 원망스럽게 물었다. "평소처럼 다리가 조금 불편한 것 같아 일을 마치면 병원에 가 보려고 했다."라고 말했다. 부모님의 성격을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두 분은 정반대다. 아버지는 매사에 낙천적인 반면 어머니는 다정다감하면서도 어떨 때는 조울증이 의심될 정도로 감정 변화가 심했다. 우리들은 어머니를 받아 주는 아버지를 호인으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가 40이 넘어서 두 아이를 키워 보니 어머니가 왜 그랬는지 조금은 이해된다.
예전 농촌 어머니들은 살림과 육아를 도맡고 거기에 들일까지 해야 했다. 어머니도 그랬다. 동틀 무렵부터 사 남매 도시락을 준비해 학교에 보내고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하고서는 집에 돌아와 빨래와 청소를 했다. 그 일을 40여 년 반복했다. 어려운 형편 탓에 초등학교도 못 마치고 23살에 시집와서 젊음과 낭만이라는 사치는 즐겨 보지도 못했다. 가끔 화라도 내지 않았다면 울화통이 터졌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날 이후 모든 농사를 뒤로했다. 봄이 와도 산에 못 가고 여름이 와도 텃밭에서 일하지 못 한다. 말은 어눌해졌고 걷는 것도 어려워졌다. 힘든 일을 그만둬서 인지 얼굴은 예전보다 편안해 보이지만 몸이 불편한 데서 오는 감정이 오롯이 느껴진다. 며칠 전에는 이까지 다 빠져 먹는 것도 힘들어했다. 몸이 온전치 않으니 음식 간을 제대로 맞출 수도 없다. 어머니의 음식 맛은 온화해지는 성격과 반대로 변해 갔다.
어머니에게 안부 전화를 드리며, 육개장 만드는 법을 물었다. 웃으시며 그냥 한 그릇 사 먹으라고 했다. 그 목소리에는 외지에 혼자 사는 아들에게 따뜻한 국 한 그릇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이제는 그것이 어렵다고 느끼는 안타까움도 온전히 전해졌다. 어머니 육개장의 마지막 재료는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