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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산책 Aug 12. 2020

여긴 내 영역이야

옥수수 껍질을 까다가

옥수수를 다듬다 말고 글을 쓰고 싶어 노트북을 켠다.    

           

우리에겐 밭이 있다. 우리가 밥 먹듯 놀러 가는 곳!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장소.               

그곳에서 그는 일하고, 나는 걷는다. 얄밉겠지만 차후 내가 왜 일하지 않고 걷기만 하는지 글을 올릴 생각이다.     

이번이 올해 두 번째 옥수수 수확!     

5일 전 첫 번째 수확으로, 신랑이 겉껍질을 벗겨내고 집으로 들고 온 옥수수는 대략 18개 정도였다. 이미 손을 본 터라 깨끗한 옥수수를 감사한 마음으로 속껍질을 까다가 까무러치게 놀랐다. 검은 점이 움직이고 있다. 갑자기 들이닥친 빛을 향해 껍질 밖으로 검은 점이 기어 나온다. 애벌레의 머리 부분이다.      

- 꺅~     

딸을 부른다.     

- 00아, 애벌레 관찰해.            

   

우리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이 조그만 생명체를 보고 나는 왜 소리를 질러가며 놀라는 걸까? 그 옥수수는 옆에 제쳐두고 딸아이에게 관찰 학습을 시킨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른 옥수수를 꺼낸다. 근데 이 옥수수 좀 이상한데. 껍질 주변에 누런 물이 들어있다. 작년 기억을 더듬어 봤을 때 필시 ‘이 안에도 애벌레가 있겠군.’이라고 생각한 순간!     

- 꺅~ 여보!     


아까 본 애벌레 굵기의 30배쯤 되는, 길이 3cm 정도의 통통한 초록 애벌레가(그냥 초록이면 그나마 나을 텐데 얼룩덜룩 무늬가 있다.) 꿈틀거리고 있다.     

이제 나는 옥수수고 뭐고 안중에 없다. 옥수수와 가장 먼 곳으로 피신을 간다.     

‘여보’라는 소리를 듣고 신랑이 부엌으로 온다. 딱한 우리 신랑. 그이라고 징그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가 아니면 해결할 사람이 없는걸. 그래도 딸은 피하지 않고 그걸 또 관찰하고 있으니 강심장인 건가?               

우리는 자주 밭에 가기 때문에 사실 벌레는 나에게 무서운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밭에서 벌레를 보면 거부감이 없는데 (심지어 사랑의 눈으로 본다. 진심이다.) 왜 집에서 벌레를 보게 되면 얼굴이 찌푸려지는지.               

가만히 생각해본다. 나름 결론을 내리자면     

          

여긴 내 영역이기 때문이다.          


내 영역에는 내가 허락한 생명체만 들이고 싶다.               

밭에서 벌레를 보게 되면 ‘내가 너희 영역을 침범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밭을 걸을 때는 노래기, 개미 등의 벌레를 밟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징그러워서가 아니다. 내가 잠시 놀러 온 것이기 때문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 매실이나 아로니아를 딸 때는 나도 모르게 벌레들에게 사과를 한다.  

             

미안해. 조그만 참아.    
    
<왼쪽> 아로니아 나무에 붙어있는 색이 예쁜 애벌레. 생김새도 신비롭다.    <오른쪽> 내가 이 곳을 사랑하는 이유. 사방이 트여있다.


그런데 신랑은 반대다. 밭에서 만나는 모든 벌레는 그에게 죽임의 대상이다.     

생각해보니 그 밭은 신랑의 영역이다.     

그는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아주며, 열매 맺기를 기다리는 진짜 농부인 것이다. (주말 농부!)     

단지 열매만 따는 나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 생각이 떠오른 나는 이 글을 마치고 마저 옥수수를 까야한다. 오늘은 애벌레와 조우하는 일이 없길 바라며.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그래도 우리 집에서는 만나지 말자.


    

어제(8월 11일)는 바람이 몹시 불었다. 들판에 초록 파도가 치는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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