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이 남기는 삶의 울림
지난봄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왔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라 큰 나무들이 꽤 많아, 나무를 제대로 보려면 길을 오가며 올려다보아야 했다. 이사한 지 일 년이 지나지 않아 철마다 어떤 꽃들이 피는지 익숙하지 않았는데 초여름에 들어서자 우리 동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자귀나무 한그루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꽃이 피기 전까지 자귀나무인지도 몰랐던 이 나무는 4층 높이까지 자란 고목이었다. 반가움도 잠시 나에게는 이번에도 자귀나무 꽃은 어김없이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아쉽게도 나는 아직 한 번도 자귀나무 꽃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다. 여름이면 하늘 높이 우뚝 선 가지 사이사이에 자수를 놓은 것 마냥 어여쁘게 하늘거리는 분홍빛 부채살 같은 꽃잎의 실루엣만 눈에 담아볼 뿐이다. 향기를 맡아볼 수도 없고 데칼코마니 같은 잎도 만져볼 수 없다. 밤이 되면 잎이 하나로 합쳐진다고 하는데 그 장면 역시 글로만 만나는 풍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본 적 없는 자귀나무 꽃의 섬세함, 보지 못한 잎의 움직임이 오히려 더 상상력을 자극하고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자귀나무는 내가 닿을 수 없는 높이에 있지만, 그 존재 자체로 나를 매혹한다.
하지만 꼭 직접 경험해 보아야만 감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가까이서 보지 못한 자귀나무 꽃이 여전히 내 마음을 흔드는 것처럼, 멀리 떨어진 산 능선 위로 펼쳐지는 노을빛, 손에 잡히지 않는 강물의 윤슬, 혹은 가보지 못한 들판에 피어 있을 이름 모를 풀꽃 하나까지도 상상 속에서 나를 움직인다. 직접 눈 앞에 두지 않아도 마음이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그 경험은 내 것이 될 수 있다.
이런 경험을 곱씹다 보면, 꼭 직접 경험만이 나를 지탱해 주는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른 이들의 이야기, 경험, 시선에도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을 맞이한다. 누군가의 글 한 편을 읽으며 마치 내 기억인 듯 가슴이 따뜻해지기도 하고, 낯선 풍경 사진 한장에서 내 삶의 단단한 울림을 얻기도 한다. 우리는 이리도 쉽게 물드는 존재이기에, 그 만큼 섬세하게 마음을 돌보아야 한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더 그렇다. 직접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다. 짧은 댓글 한 줄에서 삶의 결을 느끼고, 보지 못한 이의 온기를 만나기도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을 받아들이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없는 것, 닿지 못한 것, 보지 못한 것에서 결핍을 느끼기 보다 그 빈자리를 긍정적인 감정으로 채울 수 있다면 우리 삶은 훨씬 더 단단해지고 아름다워진다.
올해도 나는 자귀나무 꽃을 가까이에서 보지 못했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보지 못한 것이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상상과 마음의 깊이를 더해주는 통로가 된다. 손에 잡히지 않는 높이,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도 우리는 아름다움을 품을 수 있다. 자귀나무는 그래서 나에게 하나의 은유가 된다. 직접 경험하지 못해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삶은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알려주는. 닿지 못한 것들 속에서도 여전히 감동으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