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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송이로도 충분한 꽃, 튤립

삶의 여백을 채우는 간결함

by sother

꽃이 잘 팔리지 않는 여름, 온라인 꽃판매 채널의 할인 알림이 끊이지 않는다. 한여름 열기 때문에 택배로 꽃을 주문하는 것이 걱정되긴 했지만 나는 결국 꽃 한다 발을 주문했다. 미니해바라기, 미니장미, 국화, 거베라, 유칼립투스까지 다양하게 섞여 있었지만, 가장 아쉬운 건 튤립이 없다는 점이었다. 튤립은 한 송이여도 빈 공간을 단정히 채운다. 여러 송이가 모이면 꽃병 속에 완벽한 질서가 생긴다. 튤립이 가진 단정함은 사람들의 마음을 오랫동안 붙잡는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이 크레파스를 쥐고 삐뚤빼뚤 처음 꽃을 그리기 시작할 무렵 늘 튤립이 등장한다. 가운데 원을 중심으로 대여섯 개의 꽃잎으로 구성된 꽃그림은 꽃으로 인지는 할 수는 있지만, 어떤 꽃인지 특정화 하기 어렵다. 하지만 세 장의 꽃잎이 위로 솟구치고 둥글게 감싸 내려오는 단순한 모양새로 그려진 그림은 누가 보아도 튤립이다. 불필요한 것을 모두 덜어내고 남은 선과 곡선 속으로 완성되는 이 간결한 형상이야말로 튤립의 본질이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꽃의 정수를 포착한다. 그래서 튤립은 언제나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정확한 ‘꽃의 상징’으로 자리한다.

20250816_175721.png 사진: Unsplash의Simona Sergi

튤립이 절화로 사랑받는 까닭도 어쩌면 거기에 있다. 곧은 줄기로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의 튤립은 물만 갈아 주면 며칠 동안 천천히 표정을 바꾸고 심지어 줄기가 자라기까지 한다. 한 송이는 마치 간결한 시를 읊는 것 같고, 몇 송이를 모으면 에세이가 된다. 단정한 선을 가진 꽃을 오래 바라보는 일은, 내 삶의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는 훈련과 같다.


내 손에 튤립을 처음 쥐어 본 것은 유치원 졸업식 날이었다. 친구들은 알록다록 화려한 꽃다발을 받았는데 나는 빨간 튤립 한 송이를 받았다. 부끄러운 듯 가벼운 내 손을 친구도 알았는지 자신의 꽃다발에서 꽃을 나눠 주겠다고 했다. 친구와 나는 꽃다발에서 몇 가닥을 빼보려고 했지만 어른들이 포장한 꽃다발은 유치원생들에게는 꽤나 단단해서 친구의 나눔은 실패하고 말았다.


친구에게는 속마음을 비췄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부모님께 그 속상함을 내비치기 싫었다. 튤립 한 송이를 애지중지 물에 꽂아두고 꽃잎이 완전히 펼쳐지고 시들어 한 장씩 떨어질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부러워한 친구의 화려한 꽃다발은 어떤 색의 꽃들이 있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손에 쥔 그 튤립은 매끈한 빨간 꽃잎, 물을 머금은 탄력 있는 줄기, 잘 정돈된 초록 잎, 유난히 노란 암술과 짙은 검은 수술까지 또렷이 기억난다.



그 기억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지금도 꽃집 진열대에서 튤립을 만날 때면 그중 한 송이를 골라 신문지에 포장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제 나는 단 한 송이로도 충만함을 안다. 화려한 꽃다발을 마냥 부러워하지 않고, 단정한 나의 꽃 한 송이를 고르고 아끼는 법을 나이 든 나는 안다. 튤립 한 송이를 바라보는 일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나를 다독이는 연습이다. 우리는 서툴고 빈틈 많던 어린 날의 감정들을 하나씩 비워내고 정리하며 어른이 되어간다. 한 송이 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돌아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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