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백을 채우는 간결함
꽃이 잘 팔리지 않는 여름, 온라인 꽃판매 채널의 할인 알림이 끊이지 않는다. 한여름 열기 때문에 택배로 꽃을 주문하는 것이 걱정되긴 했지만 나는 결국 꽃 한다 발을 주문했다. 미니해바라기, 미니장미, 국화, 거베라, 유칼립투스까지 다양하게 섞여 있었지만, 가장 아쉬운 건 튤립이 없다는 점이었다. 튤립은 한 송이여도 빈 공간을 단정히 채운다. 여러 송이가 모이면 꽃병 속에 완벽한 질서가 생긴다. 튤립이 가진 단정함은 사람들의 마음을 오랫동안 붙잡는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이 크레파스를 쥐고 삐뚤빼뚤 처음 꽃을 그리기 시작할 무렵 늘 튤립이 등장한다. 가운데 원을 중심으로 대여섯 개의 꽃잎으로 구성된 꽃그림은 꽃으로 인지는 할 수는 있지만, 어떤 꽃인지 특정화 하기 어렵다. 하지만 세 장의 꽃잎이 위로 솟구치고 둥글게 감싸 내려오는 단순한 모양새로 그려진 그림은 누가 보아도 튤립이다. 불필요한 것을 모두 덜어내고 남은 선과 곡선 속으로 완성되는 이 간결한 형상이야말로 튤립의 본질이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꽃의 정수를 포착한다. 그래서 튤립은 언제나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정확한 ‘꽃의 상징’으로 자리한다.
튤립이 절화로 사랑받는 까닭도 어쩌면 거기에 있다. 곧은 줄기로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의 튤립은 물만 갈아 주면 며칠 동안 천천히 표정을 바꾸고 심지어 줄기가 자라기까지 한다. 한 송이는 마치 간결한 시를 읊는 것 같고, 몇 송이를 모으면 에세이가 된다. 단정한 선을 가진 꽃을 오래 바라보는 일은, 내 삶의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는 훈련과 같다.
내 손에 튤립을 처음 쥐어 본 것은 유치원 졸업식 날이었다. 친구들은 알록다록 화려한 꽃다발을 받았는데 나는 빨간 튤립 한 송이를 받았다. 부끄러운 듯 가벼운 내 손을 친구도 알았는지 자신의 꽃다발에서 꽃을 나눠 주겠다고 했다. 친구와 나는 꽃다발에서 몇 가닥을 빼보려고 했지만 어른들이 포장한 꽃다발은 유치원생들에게는 꽤나 단단해서 친구의 나눔은 실패하고 말았다.
친구에게는 속마음을 비췄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부모님께 그 속상함을 내비치기 싫었다. 튤립 한 송이를 애지중지 물에 꽂아두고 꽃잎이 완전히 펼쳐지고 시들어 한 장씩 떨어질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부러워한 친구의 화려한 꽃다발은 어떤 색의 꽃들이 있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손에 쥔 그 튤립은 매끈한 빨간 꽃잎, 물을 머금은 탄력 있는 줄기, 잘 정돈된 초록 잎, 유난히 노란 암술과 짙은 검은 수술까지 또렷이 기억난다.
그 기억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지금도 꽃집 진열대에서 튤립을 만날 때면 그중 한 송이를 골라 신문지에 포장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제 나는 단 한 송이로도 충만함을 안다. 화려한 꽃다발을 마냥 부러워하지 않고, 단정한 나의 꽃 한 송이를 고르고 아끼는 법을 나이 든 나는 안다. 튤립 한 송이를 바라보는 일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나를 다독이는 연습이다. 우리는 서툴고 빈틈 많던 어린 날의 감정들을 하나씩 비워내고 정리하며 어른이 되어간다. 한 송이 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돌아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