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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도동 Jul 19. 2021

처음 보는사람이 편해요

날 정의하지 않거든요

처음 보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들은 날 모르고 나 또한 그들을 모른다. 그래서 편하다. 우리는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정의하지 않는다. 그 정도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래 지낸 사람을 좋아한다. 그들은 날 잘 알고 나도 그들을 잘 안다. 그래서 편하다. 우리는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만 정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변한 걸 알고 앞으로도 변할 걸 알기 때문이다.




 내가 편함을 느끼는 관계는 극단적이다. 아주 오래되었거나 아예 처음 보거나. 오래된 사람이 편한 이유는 당연히 오랜 시간 동안 쌓인 데이터로 대강의 '선'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우리는 서로 좋아하는 걸 해주기보단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편한 관계가 된다. 오래 함께 해 왔다는 것은 신뢰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렇게 오래 내 곁에 남아있으니 적어도 이 시간만큼 미래를 함께 하겠지라는 믿음이 생긴다. 의외로 나는 오래 관계 맺는 친구들과 성향이 정말 다르다. 한 명은 레디컬 페미니스트, 한 명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하는 페미니스트이다. 한 번 만나면 진이 빠질 정도의 에너자이저, 한 명은 모태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이다. 나는 무교에 페미니스트는 관심도 없는 사림이고, 뜻뜨미지근한 사람이다.


 잘 될 것만 같았던 인간관계가 깨지고 나니 나와 주변 관계를 고찰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다른 이들이 어떻게 오래도록 함께했을까 생각해보니 공통점은 대화였다. 


 첫 번째 페미니스트 친구는 예전 글 '가치관 : 친구와 인맥의 차이에 대한 고민'에서 언급한 친구다. 이 친구와 잘 지낸 이유는 온전히 이 친구가 내 옆에 있어줄 거라는 믿음을 주었던 "말" 때문이다.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친구에게 그런 신뢰를 느끼면서 진정한 친구처럼 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 번째 친구는 한 번의 갈등으로 친해지게 되었다. 학창 시절 이 친구는 부끄럼쟁이에 약간은 소심하고 귀여운 친구였다. 동그란 얼굴에 말을 하면 빨개지는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사과 같다고 놀렸었다. 나는 정말 귀여워서 한 행동이었지만 이 친구가 참다 참다 어느 날 밤에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엄청 길었는데, 보낸 이유는 놀리는 게 싫다는 것이었고, 문자를 보내 일일이 설명한 이유는 내가 놀리는 것만 빼면 다시 잘 지내고 싶은 친구이기 때문이라 했다. 날 좋게 봐주어 잘 지내고 싶으니 대화를 건네어 내 행동을 돌아보게 만든 친구다. 이 친구와도 잘 지내는 이유는 서로 다름을 중간중간 알려주고 그걸 고깝게 듣지 않는 올바른 대화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힘찬 친구도 대화가 잘 된다. 이 친구도 당연하게 전공도 다르고 생각도 너무 다르다. 그런데 어떻게 대화가 잘 되냐면, 둘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데 서로의 이야기를 할 때는 정말 열성적으로 리액션해주고 잘 들어준다. 사실 대화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무언가를 고치기 위한 위의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의 대화는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인 경우가 많으니까. 그걸 잘 들어주기만 해도 대화가 잘 된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까지 재화를 한 번 시작하면 2시간은 넘게 말하곤 한다.

 마지막 친구도 비슷하다. 나와 저 친구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대화 중 나오는 커뮤니티 단어나 사상이 안 나와 정말 털털하게 이야기가 가능하다. 그러나 배경이 많이 달라서 한 번씩 위화감을 느끼곤 하는데, 그럼에도 이야기가 잘 된다. 이 친구와는 보통 심각한 이야기를 주로 한다. 먹고 살 이야기나 가족 이야기, 남자 이야기를 하는데 한 명의 이야기를 들은 후 그것에 대해 자기의 생각이나 경험, 조언을 해주어 정말 영양가 있는 대화를 했다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내 오랜 친구들과 잘 지낸 이유는 "대화"가 잘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친구들과의 대화가 정말 술술 잘 되기만 했던 건 아니다. 나도 그렇고 저들도 그렇고 모든 순간이 즐겁진 않았을 것이다. 한 번씩 선을 넘어서 기분 상하게도 하고 대화가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런 순간들을 몇 번 겪고 나면 어느새 이보다 더 대화가 잘 되는 친구도 없다고 느낀다. 


그리고 또 느꼈던 건 오래 지내기 위해서는 서로를 어떤 사람인지 "정의 내리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내 친구도 원래는 남자를 좋아하는 친구였지만 현재는 페미니스트에 비혼 주의자이다. 그렇게 사람은 살아가면서 가치관이 변한다. 그런데 내가 그 친구를 처음 이미지에 고정시켜 놓으면 속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딸려온다. 


"그렇게 남자를 좋아해 놓고 왜 저러지?"

"자기도 치마 입고 꾸며놓고 지금 와서 왜 다른 여자들이 깨달음이 부족하다고 하지?"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나 또한 처음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내 친구가 그럴 이유가 있었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 변화를 그저 받아들이고 친구에 대해 정의 내리지 않으려 했다. 왜냐하면 첫 이미지와 지금 이미지가 충돌하면 거기서 나오는 찌꺼기들은 그와 나 사이에서 그 친구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만 씌워 우리 관계를 뿌옇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첫 이미지로 정의 내리면 관계를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욱 인간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데에 중요한 건 공통사, 그중에서도 가치관을 가졌다거나 같은 취미를 가졌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서로 극단적으로 다르다면 대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니 어렵지만, 단순 공통사가 같은 걸 찾으려면 정말 널리고 널렸다. 취미가 같은 사람을 찾고 싶으면 동호회에 가면 되고, 사상이 비슷한 사람을 찾으려면 정당에 가입하거나 커뮤니티에 가입하면 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살아가면서 계속 변하는 것들이다. 그럼 거기서 만난 사람은 나중엔 안 맞는 사람들이 되는데 그건 너무 웃긴 인간관계 아닌가.


 결국 사람은 살아가며 계속 변화한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은 관계를 맺을 때 가치관과 관심사가 다르다고 해서 나랑 안 맞을 거라고 생각하기보단 어차피 또 변할지 모르는 것들에 연연하기보단 그 사람이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지, 나도 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는지, 그것을 존중해주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그렇게 서로를 존중해주고 바꾸려 하지 않고 작은 갈등은 적당히 감내한다면 언젠간 내 노력으로 만든 멋진 관계를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글을 적기 전엔 나도 잘 몰랐던 이유가 글을 적으면서 확실히 보이는 것 같다. 여전히 인간관계는 잘 못한다. 저 위의 것들이 내 순간의 감정 때문에 안 지켜지기도 하고,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상대에 상처 받아 힘들어서 포기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좋은 사람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상처 받더라도 계속 열린 마음을 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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