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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도동 Jul 26. 2021

이별은 갑작스럽다

후회는 항상 늦다

친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말을 들었다. 패혈증이 심해졌는데 왜 이제야 왔냐고 그러더라. 온전한 장기가 하나도 없다고 한다. 군산 할머니는 호흡기는 사용하지 않을 거라 하셨다. 할아버지가 원하지 않으신다고. 나는 할아버지를 정말 많이 닮았다. 고집이 세지만 대신 그 고집으로 자기 소신을 끝까지 지켜 한결같은 태도를 가지고 계신다. 조용히 주변을 잘 살피어 소외된 이를 잘 챙겨주신다. 비록 엄마가 어린 시절 공식적인 경제활동을 못하신 분이라 능력 없는 아버지였지만 나에겐 우리 엄마와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시는 따듯하고 좋은 분이다. 

저번 주에 할아버지 집에 갔다가 돌아오기 전 했던 작별 인사가 떠오른다. 몸이 둔해지셔서 차마 대문까지 못 나오시고 창가에 몸을 기댄 채 웃으시며 다음에 또 보자고 하셨다. 지금은 다음이 또 오지 않을까 하는 안 좋은 생각이 든다. 이전에 계속 우리 집에서 젤 잘생긴 우리 할아버지 꼭 그려드려야지! 하고 계획을 미루었는데.. 정작 다음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은 이 시점에 나도 미룰 수 없는 일들이 생겼다. 졸업심사며, 공모전, 교수님이 추천해주신 면접까지 당겨져서 그림 선물을 생전에 해드리지 못할 것 같아 무섭다.


사람은 태어나고 죽기 전까지 이별을 맞이하는 건 불가피한 일이다. 이별은 그렇지 않은 모양들로 내 곁에 조용히 숨 쉬다가 갑자기 눈앞에 훅!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반려동물과의 이별, 고향과의 이별, 소중한 물건과의 이별 등 다양한 이별이 있지만 역시 정신적으로 연결되어있던 사람과의 이별이 가장 힘든 일 같다.



첫 이별 : 2차 할머니의 장례식

나는 가족이 얼마 없어 딱 한 번의 장례식을 경험했는데 그게 2차 할머니 (진해에 살던 시절 친할머니는 우리 가족과 같은 아파트 2차에 살고 계셔서 별명처럼 불러왔다.)의 장례식이었다. 할머니는 우리 가족이 부산으로 이사 가면서 할머니와 떨어져 살기 시작하며 익숙해져 연락이 뜸해진 시점에 돌아가셨다. 아직도 진해 용원동 작은 마을 할머니가 살던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면 할머니가 심한 대구 사투리로 밥 먹으라고 부를 것만 같다. 이젠 없지만.


내가 할아버지와의 이별이 무서운 이유는, 안 친했던 2차 할머니의 죽음도 나에겐 꽤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절하고 나를 좋아해 주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이 안된다. 2차 할머니는 생전 나에게 무서운 할머니셨다. 항상 나에게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잔소리만 하셨다. 매일 혼나고 강요당한 기억만 있었다. 그래도 에너지 넘치시던 분이라 100살 넘게 살 거라 생각했는데, 우리 가족이 부산으로 이사 가고 연락이 뜸해진 시점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며칠간 할머니는 혼자 빈 집에 외로이 계셨다. 전화를 받지 않는 할머니가 걱정되어 간 집 앞에서 구급대원들과 아버지가 들 것에 할머니를 올리고 흰 천을 덮은 채 나오고 있었다. 천 사이로 나온 노랗고 푸릇한 다리가 보였다. 그게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할머니는 아버지와 마지막 안부 전화를 하면서 갑자기 내가 모은 돈은 네가 준 용돈 모은 것이니 다 네 것이라는 말과 함께 사람이 바뀐 듯 따듯한 말들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다음 주 심장마비로 그렇게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도 매일 오느라 수고했다, 조심히 가라는 말만 하셨는데 이번엔 다음에 꼭 보자는 말을 하시며 내가 밭 사잇길을 따라 골목에 접어들 때까지 배웅하셨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고 얼른 할아버지를 멋있게 그려 병문안을 가져가고 싶다. 할아버지가 또 오느라 수고했다며 웃으시고, 사진 가득한 벽 한쪽에 내 그림을 걸어놓으시면 좋겠다. 그저 그 사이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망을 바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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