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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춘노 Jan 02. 2022

지리산에서 곰을 만난다면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모르는 세상사

  배에서 울리는 점심 신호에 무작정 사무실을 나섰다. 새해 첫날, 나는 서류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럴 때나 하게 되는 귀찮은 작업 말이다. 그래서 이런 작업을 해두라고 신정에는 쉬는 걸까? 당장 일은 일이고, 주말 같은 새해를 맞이하기 앞서서 난 배부터 채워야 했다. 


  짧은 고속도로를 타고, 지리산 들어가는 인근에 자주 가던 중국집에서 해물 짬뽕을 먹었다. 근처에서 살 때는 야근 타입 식사 장소였는데, 장사가 잘되어서 확장 이전했나 보다. 복직하고 한 번 가보긴 했는데, 그 짧은 사이에 변화가 신기했다.      

  배도 채웠겠다. 지리산 국립공원에 와운마을을 향해서 길을 잡았다. 국립공원 안에 있는 마을로 천년송으로 유명하다. 그래도 뭔가 새로운 마음가짐이 필요할 때는 와운마을을 잘 다녀왔는데, 주차장에서 왕복 2시간이면 다녀올 수 있는 그나마 가벼운 산책길이다. 

  그런데 간과한 것이 있었다. 새해 첫날이라서 나와 같은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고, 연말에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은 설산이라는 것을 말이다. 입구를 들어서는 곳부터 눈길이다. 제법 많은 사람이 밟은 곳이라서 얼어서 미끄러운 길을 천천히 올라갔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걷는 것은 내가 유일하게 갖는 운동이자. 치료였다. 그래서 마음이 복잡하면, 단순히 평지를 걷는 것이 아니라 약간 굴곡이 있는 이 코스를 즐겨 찾았다. 오늘은 신년이었고, 의미도 있었으니까.      

  마스크 사이로 나오는 뜨거운 김 때문에 안경이 뿌옇다. 마스크를 살짝 내리자니, 몇 발자국 앞에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여 그냥 쓰고 쭉 길을 오른다. 미끄러운 눈길 따라 걷다가 마을 입구쯤 다다르고, 의자에 앉아서 잠시 계곡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왜 이곳에 왔을까? 나는 산을 오르는 것을 참 싫어하는데     


  생각이 많아지고, 마음이 혼란하면 찾았던 이 길이 어떠한 의미가 있을지. 잠시 회의감이 들었다. 날씨가 춥지만, 그래도 시내에는 눈이 거의 녹아서 보이지도 않는데, 위험한 눈길을 걸어 올라가는지. 마냥 겨울 산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마음에 그늘이 있으니, 우울함이 항상 녹지 않았구나. 그래서 나와 비슷하게 쓸쓸한 산을 내가 찾는구나.     


  그러다 표지판이 보였다. ‘지리산에서 곰을 만나면’이라는 안내판. 아마도 세상 살면서 실제로 지리산에서 곰을 만나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거의 일어나지 않을 일임에도 알아야 하고, 또 걱정하는 것이 내가 고민하는 무언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일어나지 않은 일에 걱정하면서, 또 대비하기 위해서 고민하는 모습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난 천년송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기 위해서 갔다. 아마도 그렇게 하면 내 마음이 좀 가벼워질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말이다.      


  부질없는 일이다. 
  한 번도 그러한 기도는 이뤄진 적이 없으니까.     

 

  결국, 나는 천년송을 보지 않고 그냥 내려왔다. 애써 미래를 부정하거나 피하려는 낙관적인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안전하게 내려가는 것에 집중했다. 

  그런데 그러다 지리산에서 곰을 만났다. 안내표지판 위에 가지런히 세워놓은 눈으로 만든 형상에서 곰을 발견했다. 뭐 이런 것도 곰을 본 것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세상은 모르는 거니까. 이렇게도 저렇게도 만날 것은 만난다고 생각하면서 지리산에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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