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시선에서 도망가고픈 마음
경계의 구분은 누가 지어주는 것일까? 가끔 장애 정도 심사 신청을 위해 민원인에게 서류를 받아 국민연금공단에 보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세상 사람들은 참 구분 짓는 것을 좋아한다.’
두꺼운 장애 정도 심사 안내문 속 장애 코드를 보면서, 더 많은 구분을 필요하는 질병을 떠올린다. 그렇지만 난 딱 두 개로 질병을 정의한다. 기본적으로 내보일 수 있는 질병과 그렇지 않은 질병으로 말이다.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다는 것이 질병이다. 그래도 사람은 보통 질병을 주변에 알리는 것을 주저한다. 국가 기밀에도 등급이 있듯이 사람의 질병 공개도 최상위 비공개 항목이 있는데, 아마 성(性)과 정신이 관련되면 언급 자체를 거부한다. 설령 나만 말하지 않았다고 그것이 감춰질까? 썩어버린 동태 눈깔처럼 퀭해진 눈가만 보여도 저 사람은 병자라고 인식하는데, 내가 아니라고 부정해도 숨길 수 없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직장인은 업무적으로 힘들다 싶은 수준의 부적응은 누구나 거친다. 신규 직원들도 그렇고 새로 업무가 바뀌는 사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나 같은 경우에는 자신감 있게 들어간 시청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하고서 업무가 두려웠다.
세상은 우울한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근처에 함께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 우울함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슬픔을 어느 정도는 이야기를 통해서 나눌 수는 있어도 방사선에 피폭되듯이 생활 속에서 배어든 우울함은 주변을 물들게 했다. 내 주변에도 그러한 우울한 사람이 있었다. 꽤 가까운 사람으로 말이다. 아무리 이해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사발이 작으면 감당할 수 없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건 하나로 터지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연속되는 사건과 환경 변화에 나는 마음 사발이 넘치고 있었다.
한여름에 인사발령으로 업무가 바뀌고 오늘이 마지막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그것조차도 버겁고, 출근하는 길에 여러 번 핸들을 꺾어서 다른 곳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사람들과의 대화 중에 짜증이 묻어나고, 만사에 기운이 없었다. 식욕은 없고, 사람들과 식사 자리가 거북했다. 먹은 것도 소화가 되지 않아서 격일로 끼니를 걸렀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묻는다.
“무슨 일이 있어?”
아픈 곳이 있으면 병원을 가라고 하는데, 하루 연가를 내고 방구석에서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보아도 내일이 올 때쯤에는 세상 다 산 것처럼 살았다. 영양제로 하루를 버티고, 소화가 되지 않아서 그렇다며 사람들 보는 앞에서 소화제를 마셔본다. 나는 일 때문에 그렇다기보다 잠깐의 스트레스로 소화가 안 되는 것뿐이다. 단지 그뿐이기에 사람들과 밥을 먹기 싫은 것이 아니라 밥을 안 먹는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사람들이 보는 나는 위태로워 보인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은 스트레스 때문이다. 나는 소화 기관이 약하다. 그뿐이다.’
공식적으로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다녔는데, 소문은 그렇게 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스트레스로 심각한 우울증에 빠진 거 아니냐며, 상사가 챙기는 것 같은 말을 하는데, 그 자체도 부정하고 싶었다. 모든 것에 대한 ‘척’을 할 수 없게 되자. 마음속으로 ‘탓’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업무가 늘어난 것에 대한 모든 주변 상황에 대해 분풀이를 하고 싶었고, 이 나이에 입사해서 이미 내 친구들은 거친 이 순간을 덤덤하게 지내지 못하는 평범하지 못한 나를 결국 비난했다.
그렇게 오랜 고민 끝에 나도 슬슬 인정하게 되었다. 진짜 내가 마음이 아프구나.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아프구나. 그렇지만 그러한 마음을 내보이면 안 될 거 같았다. 만약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끝날 거 같았다. 아니 끝내고 싶었다.
'난 마음이 아프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