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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춘노 Jun 22. 2021

생후 434개월의 걸음마

나에게 자립이란?

  산에 들어온 지 벌써 1년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최근 가장 큰 일이라면 내 공간이 생겼다는 것이다. 집 앞에는 람천이 있고, 바로 앞에 구름이 걸려있는 지리산도 있다. 그리고 밤에는 면 소재지인 마을에서 보는 하늘은 별이 밝게 빛난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 이런 대사를 했다.


“달도 없는 깜깜한 밤에 빛나는 별처럼”

  이사를 하고, 창밖을 보다가 문뜩 그 대사가 떠올랐다. 나는 그렇게 달도 없는 깜깜한 밤에 빛나는 별처럼 생긴 집을 얻었다. 물론 그 시작은 감성적인 풍경과는 다르게 순전히 경제적 이유였다. 부모님 집에서 출퇴근은 주유비와 요금소 비용이 월세 30만 원을 상회해서 주머니가 부담스러웠던 차에 좋은 방이 나와서 바로 계약했다. 


  우리 부모님이 사시는 집은 서까래가 소나무로 된 집이다. 할아버지께서 지었던 그 집에서 아버지가 태어나고, 내가 태어났다. 흔한 대문이나 담벼락도 없이 마당과 마루가 있는 집이지만, 흙벽과 시멘트가 공존하는 오래된 시골집이다. 그런 곳에서 서른 넘은 노총각이 살기엔 좁기만 했다. 에어컨도 없는 그 방에서 여름을 보내면 더 우울해질 것 같아서 마음먹고 집을 나왔다. 고시원 생활은 오래 했지만, 내 평생 이렇게 넓은 공간에서 생활하긴 처음이었다. 

  방 하나에 넓은 거실에 싱크대가 있고, 화사한 욕실이 있다. 애초에 펜션으로 사용하려고 지은 구조 같은데, 독신남이 혼자 살기에는 참 좋았다. 전에 살던 분은 깔끔한 성격인지.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물건을 들여놓는 것도 몇 번 땀을 흘리고 나니, 끝이었다. 집주인이 집안을 설명하면서 이사를 다 했느냐는 질문에 끄덕이고는 털털한 노총각답게 이불만 놓았다. 여름이니 선풍기 하나를 주문하고, 밥상을 하나 사서 밥도 먹고, 노트북을 놓고서 글도 썼다. 옷걸이 하나만 놓고 나머지는 책부터 옷가지는 바닥에 깔았다. 그렇게 해도 공간이 남았다. 냉장고는 준비 못 했지만, 싱크대 서랍장에는 라면과 즉석밥과 각종 즉석요리를 쌓아 뒀다. 그것만으로 풍족한데, 방을 얻었다는 말에 친구가 택배로 보내준 휴지 한 통이 더 들어오니 마음이 뿌듯했다.

  결혼한 동기들이 억이 넘는 집을 사서 신혼살림을 차린다는 자랑을 해도 부럽지 않을 만큼의 나의 공간에서 첫날 생후 434개월 만의 독립을 자축하고 싶었다. 차를 타고 10분은 나가서 인월면에서 치킨 한 마리를 사고, 소주 한 병을 사 왔다. 이런 날은 술이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은 넓은 공간에서 혼자 건배를 했다. 그리고 소주 한 병 정도 마신 상태에서 집을 나섰다. 일터로 보는 산내면이 아닌 내가 사는 곳의 주변이라는 생각에 차보다는 발바닥으로 밤 산책을 걷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산은 그대로인데, 나는 이곳에서 1년을 보냈다. 여름에 와서 가을을 맞이하고, 한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했다가 다시금 여름을 만났다. 아무리 경제적 이유라고 하였을지라도 일하기 위한 곳이 아닌 살기 위한 밤의 지리산은 드라마 대사처럼 달도 없는 깜깜한 밤에 빛나는 별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계곡의 물줄기와 저기 인월면부터 흘러오는 물줄기가 합쳐지는 람천. 그곳에 보이는 나의 보금자리는 그 순간만큼은 난해한 산내면이 아니라 마음속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줬다. 그렇게 그날부터 아침에는 일터의 산내와 퇴근 후에 휴양지 산내로 이중적인 생활을 하면서 면서기 2년 차를 보내고 있다.

  주변이 변한 것은 아닌데, 서서히 내가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알아가기까지는 참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것, 결국 나 스스로에 대한 인정이라는 충고가 슬슬 들렸다. 이제는 들리는 람천의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스스로가 변하고 있다는 여름의 자각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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