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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랑 Apr 18. 2019

#19. 인생에 부사가 많으면 어떻게 될까

 며칠 전 느닷없이 컴퓨터가 랜섬웨어에 걸렸다. 영어로 온 메일을 열어봤을 뿐인데 말이다. 영어를 못하는 내가 열었기 때문일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걸 읽지 못하는 사람이 열어 심통이 난 것일까.

  며칠 전 느닷없이 위염에 걸렸다. 먹은 게 거의 없음에도 말이다. 동네 가정의학과 선생님은 스트레스성 위염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죽을 때까지 이 위염은 사라지지 않는 걸까.


  아침에 집 밖을 나설 때는 쌩쌩하던 몸이 퇴근 후 집에만 돌아오면 열이 펄펄 끓었다. ‘펄펄’이라는 부사는 눈이 올 때만 썼는데 몸에 사용해 보니 새롭다. ‘펄펄 눈이 옵니다.’ 신나는 캐럴에 이런 가사를 붙여보니 무섭기도 하다. ‘펄펄 몸이 끓습니다.’

 부사가 많은 글은 좋지 않은 글이라 들었다. 부사는 문장의 형용사나 동사를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꾸며 주는 역할을 한다. 쉽게 얘기하자면 ‘꾸며주는 말’인 셈이다. 부사 없이도 뜻을 전할 수 있기 때문에 부사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부사가 많이 들어간 문장은 읽는 사람을 피로하게 하고 담백한 맛을 앗아간다. 전하고자 하는 바를 어지럽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아예 쓰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니다. 적절히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일이 그렇듯 적절히, 적당히,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말이다. 좋은 작가들은 이것을 적재적소에 사용한다.


 나는 글을 쓰고 나면 퇴고를 한다. 이 말은 '나는 숨을 쉰다.'와 같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행하던 일이다. 너무 당연해서 간혹 누군가 글쓰기 모임 등에 퇴고하지 않은 글을 보여주거나 발표하면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나는 퇴고할 때 부사들을 부러 빼는 편인데 신기하게도 글의 맛이 더 살아난다. 부사를 사용하는 이유는 조금 더 잘 전달하고 싶어서인데 넣을 때는 만족스럽다가도 퇴고를 거쳐 부사를 빼고 나면 이전보다 훨씬 나은 모습을 보여준다. 과하게 꾸미려 한 문장은 본래의 감정과 의미를 가려버린다.


 인생에 부사가 많으면 어떻게 될까. 꾸미다 보면 나에게도, 남에게도 진심이 가려진다. 애초에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잊게 만든다.

 꽃이 피는 계절에는 꽃을 보러 가면 될 일이다. 보고 싶으면 보고, 만지고 싶으면 만지고, 사랑하고 싶으면 사랑하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보러 가면 될 일이다. 말하고 듣는 일. 전하고 전달받는 일.

 나는 늘 넘치는 쪽에 가까웠다. 아니면 스스로 넘친다고 믿는 부족한 사람이거나. 어떤 때에는 고귀하다고 믿는 자신의 사랑이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꽃은 누군가를 위해 피는 게 아니다.


 시집을 읽는다. 시인들은 부사를 사용하지 않고도 그가 어떤 감정인지 느끼게 한다. 꾸며주는 말 대신 비유나 은유 등을 사용하여 보여준다. 그들은 슬플 때 슬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는 슬플 때 슬프다고만 말한다. 그 외에 다른 것들을 섞지 않는다. 어떤 때에는 짧고, 어떤 때에는 긴 호흡으로 읽는 이를 그들의 감정에 빠뜨린다. 우리는 허우적거릴 틈도 없이 복판에 떨어져 느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인생에 부사가 많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시집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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