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부모.
드라마를 보면서…엄마란 어떤 사람인가? 되물어보게 되었다.
'금명아 아가‘
서울살이에 지친 딸내미가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는 짜증만 내는 딸을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르고 달랜다. 나는 드라마 속 장면을 보며 '아 엄마는 이렇게 하는 거구나.’ 배운다.
아빠는 딸의 기숙사 앞에서 하루 종일 딸을 기다린다. 핸드폰도 없던 그 시절에 객지 사는 딸 얼굴 한번 보고 가려고 하염없이 기다린다. 짬뽕을 사주고 그릇 안에 오징어를 다 건져내 딸에게 덜어준다. 딸은 서울 신고식을 제대로 치르고 아빠 얼굴을 보자마자 울음이 터진다. 사회인이 되어가는 딸은 속에서 나는 옹이를 부모 모르게 꽁꽁 숨긴다. 자식의 옹이를 알면 무쇠 같은 아빠는 온몸 던져 해결하려 들 것을 알기에. 무쇠가 무너질 때는 자식 일 밖에 없었으니. 딸을 두고 버스에 오른 아빠는 영원히 크지 않는 딸에게 또 미안해질 것 같다. ‘아이고 내가 저것만 두고 가네 ‘ 가슴이 미어지는 발걸음이다.
폭싹 속았수다 드리마를 보면서 내 엄마가 생각나고 기숙사에 간 딸이 생각나고, 자식이 주는 신비한 힘을 느낀다. 스무 살도 안된 큰 아이가 세상에 나가 처음 겪어내는 옹이가 가슴 아프다. 내 가슴에도 옹이가 생기는 것만 같다. 나는 아이가 클수록 엄마가 더 보고만 싶다. 아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아이가 크면 편할 줄 알았건만 세상에서 겪어내야 하는 생채기를 바라보려니 미어진다. 아이가 아프면 나는 더 아프다. 그래도 엄마에게 옹이를 나눠주면 좋겠다. 나도 처음 겪는 일이라 엄마에게 전화하고 싶다. 자식은 신비롭다. 나를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다. 그러면서 차츰차츰 마음근육이 생기는 것 같다. 눈물 콧물 다 빼는 드라마를 보면서 엄마를 배운다. 다 받아내주지 못하는구나. 아 나는 여전히 어린 엄마구나. 애들이 크면 마냥 편한 줄 알았다. 자식은 눈물 마를 날 없게 하는 신비한 존재다. 나는 그런 자식 둘의 엄마다.
또 다른 드라마는 해방일지다. 엄마는 농사일에 싱크대 일에 일요일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나마 교회 갈때는 일요일엔 쉬었단다. 남편에게 나 이제부터 교회갈거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서른이 넘어가는 삼남매를 독립시키지 못한 채 함께 살고 있다. 엄마는 큰 아이가 마음에 드는 남자 친구를 데려와 세상 다 가진 듯 행복했다가 둘째 아이가 회사를 그만둬서 속이 상하고, 막내가 남자 친구와 헤아져 혼자 우는 속내를 알고는 눈물을 훔친다. 엄마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그리고 밥을 안쳐놓고 잠시 눈을 붙인다는게 그 뒤로 일어나지 못했다. 삼 남매는 엄마가 남긴 김장김치를 꺼내 아버지 밥상을 차리며 하염없이 운다. 그리고 서울로 떠나 독립을 한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신비롭다. 붙잡아 놓고 있으면 서로가 크지 못하고, 분리되려 하면 가슴이 시리다. 그래도 서로가 살려면 우리는 이 힘겨운 분리라는 작업을 계속 해내야 한다.
"엄마보다 한 뼘 더 나아갈 딸의 삶을 위하여."
"어린 부모의 여름은 한여름처럼 무성하게 자랐다."
"엄마라는 백만 번 고마운 은인에게 낙서장처럼 대했다. 말도 마음도 고르지 않게 튀어나왔다…"
"돈이 무섭나 자식이 무섭지!"
"나도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 많거든? 애순아 퍼내 말해."
드라마 대사가 내 마음에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