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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lblue Apr 10. 2023

슬램덩크에서 가장 순수한 남자

아마추어의 레거시, 풍전의 에이스 남훈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 사람은 강렬한 복수심에 사로잡힌다. 복수심은 칼날과 같아서 복수해야 할 대상이 명료할 때조차 쥐고 있는 사람에게도 상처를 입히기 마련이다. 분노해야 할 대상이 명료하지 않을 때는 더 큰 문제가 된다. 방향성을 잃은 복수심은 오히려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들을 망가뜨리고 마침내 스스로를 향하는 자기 파괴적인 결말을 예비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로만 채워져있지 않다. 좋은 감독과 동료들, 그리고 열렬한 응원으로도 바로잡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풍전이야기다.


농구는 언제 가장 즐거울까?


윤대협과 남훈은 이길 때라고 대답한다. 그 어떤 순간에도 페어플레이를 잊지 않는 윤대협과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남훈은 외견상 반대 지점에 있는 캐릭터다. 하지만 의외로 둘은 매우 닮아있다. 겉보기에는 매우 차분해 보이지만 사실은 승리를 향한 집념과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에서. 전반적인 농구 센스도 뛰어나고 팀 장악력도 강력해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는 동료들이 있다는 점도 유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과정의 순수한 즐거움에 가장 강력하게 매료됐었던 선수라는 공통점이 있다. 승리에 대한 열망이 이글거리다 못해 라커룸을 사우나실로 만들어버리는 이정환이나 전국제패라는 꿈에 눌려 (평범한) 동료들로 하여금 과정 자체를 고통스러운 고행의 길로 인식하게 만들어버렸던 채치수와는 달리 두 사람 모두 경기 과정의 즐거움을 백 퍼센트 만끽하는 타입이다(남훈 흑화 전 기준). 최악으로 압박스러운 상황에서 팀의 기대를 어깨에 얹고 어떻게든 돌파구를 만들어내는 에이스라는 점에서도 두 사람은 매우 닮아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윤대협이 승리에 대한 강한 집념을 즐거운 농구를 더 즐겁게 만드는 스파크 중 하나로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면 남훈은 그 집념이 들불처럼 번지는 걸 막지 못해 결국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농구조차 집어삼킬 뻔했다.


윤대협은 슬램덩크에서 가장 프로에 가까운 멘탈을 보여주는 선수다. 그는 분명 집요하게 승리를 추구하지만 채치수처럼 전국제패라는 거대한 꿈보다 현재 경기에 집중한다.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을 수 있지만 당장의 한 경기, 한 경기를 쟁취해야지만 꿈에 가닿을 수 있다 것을 그는 잘 이해하고 있다. 이정환을 잡는다. 서태웅을 봉쇄한다. 매 경기마다 살아남는 것. 프로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윤대협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카드를 이기기위해 활용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충분히 즐긴다.


하지만 남훈의 승리에 대한 집념은 어딘지 이상하다. 뭔가 엇나가 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윤대협처럼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사용해야한다. 그러나 그는 한가지 전술만을 사용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런앤건을 할 수만 있다면 사실 그에게 승리는 부차적인 문제인 것이다. 승리에 집착하면서도 한가지 전술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 모순이다. 결정적으로 그는 윤대협과 달리 철저히 아마추어적이다.


승리에 대한 강력한 집념이라는 비슷한 모습을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두 사람. 이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했을까? 두 캐릭터의 전혀 다른 경로를 살피기 위해서는 윤대협에게 패배란 성장을 할 수 있는 기회였던 반면에 남훈에게는 농구부의 와해를 초래하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었다는 점을 인지하는게 중요하다.


슬램덩크에서 모든 캐릭터는 성장을 지향한다. 이정환이나 채치수를 보면 외형상 이게 고등학생이란 말인가 싶을 정도의 원숙함이 보이지만 이들 모두 내면은 고등학생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믿어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팀에 헌신하는 강백호나 좋아하는 걸 더 잘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서태웅, 존경하는 감독이 있는 팀에서 뛰고 싶다는 이유로 농구 명문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북산에 들어온 정대만, 첫 패배를 경험하고 울음을 참지 못하는 정우성 모두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고등학생다운 어린 면이 있다.


이들에게 좌절과 패배는 모두 다음 단계를 위한 성장의 바탕이 된다. 바꿔 말하자면 이들에게는 대개 아무리 심하게 추락해도 만회할 수 있는 다음 경기가 예비되어 있다. 졸업이라는 유일한 데드라인 전에 서 있는 한, 스스로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다음 기회가 존재한다. 상양처럼 감독이 부재하거나 북산처럼 수시로 자리를 비운다하더라도 이들에게는 팀과 학교가 남아있다. 정대만이 폭력사건을 일으켜 농구부를 없애버리려고 했을 때조차 결국 부는 유지된다. 사실 북산의 가장 큰 위기는 시험 점수가 모자라 정대만, 송태섭, 강백호 바보 트리오가 경기에 출전하지 못할 뻔 한 순간이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학교가 운영에 관심이 있든 없든 대체로 농구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유지된다는 점에서 슬램덩크는 매우 안전하고 사랑스러운 세계다.


그러나 풍전만은 다르다. 비교적 안전하고 따뜻한 세계에서 풍전전만이 유독 스포츠계의 어두운 면을 함께 다루고 있다.


다른 학교들과는 달리 이들에게 패배는 다음 성장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아니라 절대적인 끝을 의미한다. 한 번의 패배가 그들이 사랑하는 농구를 파괴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투자를 지나치게 많이 한 풍전 재단은 농구부에 실적을 원한다. 프로의 세계처럼.


그러나 슬램덩크 내의 모든 선수들은 아마추어다. 이미 프로 구단에서 눈여겨 볼정도의 재능을 지닌 채치수조차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고 변덕규는 애초에 가업을 이을 생각이었다. 권준호에게도 농구는 기한이 정해져 있었기에 언제든 지금 뛰는 순간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한다. 그렇기에 이들은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부활동은 지극히 아마추어적인 즐거움으로 가득한 영역이다.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는 미래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눈앞에 존재하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면 되는 거다.


 그런데 풍전만은 선수들에게 현재가 아닌 미래를 원한다. 8강 이상의 결과를. 이 지점에서부터 풍전 선수들에게 경기란 더 이상 성장을 향해 가는 과정 같은 순수한 것이 아니게 된다. 한 번 패배할 때마다 그들이 좋아하는 농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닫혀간다. 윤대협과 남훈이 체감하는 경기의 무게는 다를 수밖에 없는 셈이다. 패배의 의미는 더더욱. 남훈에게는 매 경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칩을 베팅하는 올인게임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 번이라도 진다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확실히 풍전은 슬램덩크의 다른 학교와는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이기기 위해서는 득점을 해야 한다. 그리고 득점으로 가는 가장 빠른 방식은 런앤건이다. 처음으로 농구를 시작한 아이들은 림에 골을 넣는 순간에 매료된다. 승리를 향하는 수많은 과정 중 하나인 디펜스와 리바운드, 패스와 블락은 그 이후의 이야기다. 호흡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미친 듯이 펌핑하며 쏟아져 나오는 아드레날린. 쾌속 질주와 망설이는 순간이 없는 호쾌한 플레이. 속도감과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 받쳐줘야 하는 스피드와 빠른 속도의 공수 체인지를 소화하기 위해 필요한 절대적인 체력에 자신 있는 팀만이 가능한 런앤건. 수줍음이 많아 보이던 어린 남훈을 단지 경기를 더 가까이 보고 싶다는 열망만으로 선수 벤치까지 내려오게 만든 노감독의 런앤건은 농구의 가장 멋진 부분만을 응축해 놓은 결정체였다. 과정보다 승패가 중요한 프로의 세계에서는 심심치 않게 보게 되는 (다소 옹졸해 보이는) 지키는 게임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상대편의 점수를 쟁탈해 가는 이 공격형 농구는 매 순간이 박진감 넘치는 모먼트로 가득하다. 뛰고 달리고 슛을 한다는 단순함으로 가득한 전술. 어린 남훈에게는 노감독의 경기 그 자체가 농구였을 것이다.


노감독은 이야기한다. 고교 시절은 한정적이다. 다양한 것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그래서 한 가지라도 제대로 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게 런앤건이다. 노감독은 일본 고교 부활동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선수들을 프로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과정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도록 농구의 즐거움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조재중 같은 훌륭한 프로 선수를 키워내는 것이 중요했던 안한수 감독이나 전국제패가 목표였던 유명호, 남감독과는 달리 노감독은 아마추어 농구 그 자체를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어린 학생들이 런앤 건을 통해 순수한 농구의 즐거움을 발견하고 그 과정 안에서 앞으로 삶의 바탕이 될 자질들을 키워나가길 원했다. 그러니까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마음 같은 것들을.


무엇보다 점수를 지키는데 급급해 멋진 경기를 포기하는 프로들과는 다른, 아마추어 정신을 잃지 않길 바랐다. 바꿔 말하자면 잃을 것이 두려워 방어적으로 구는 어른이 되지 말라고, 지금 이 순간 너희들이 보내고 있는 이 청춘의 시간들을 잊지 말라고,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나서도 좋아하는 것을 향해 잃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오롯이 내던질 줄 아는 지금의 그 용기를, 그 용감한 감각을 잊지 않기를 아마도 노감독은 바랐던 것 같다. 그리고 그건 노감독 자신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세상의 비정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어른이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프로의 세계에서 승리는 절대적이다. 과정보다 더 중요하게 카운트된다.


세상은 당신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승리를 쟁취해 내느냐가 프로의 가치를 만드는 유일한 척도가 된다. 노감독 역시 현역으로 농구를 했던 선수였다. 풍전의 아이들처럼 그 역시 농구에 매료되어 선수 생활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에게도 있었을 수많은 패배와 수많은 승리의 순간. 노감독은 선수로서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프로의 세계에 가까이 가면 가까이 갈수록 승패에 대한 압박의 밀도가 높아지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인생은 영화와는 달라서 반짝이는 한 순간만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한 번의 승리 뒤에는 대체로 또 다른 패배가 예정되어 있다. 그는 수없이 많은 경기를 치르면서 세상이 승패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지쳐버린 것 같다. 한 번의 눈부신 승리 이후에는 해피엔딩이 아니라 더 큰 기대가 돌아온다는 사실에.


'전국대회 우승이 아니면 납득하지 못할 그런 사람들이란다. 이제 이 늙은인 지쳤단다... 전국대회를 우승하면 다음은 연패를 하라고 하겠지. 한 번이라도 타이틀을 빼앗기면 또..'


풍전은 노감독의 자리를 박탈한다. 감독이 실적을 내지 못하면 경질하는 것은 사실 아마추어 계에서도 꽤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슬램덩크의 세계관이 무척이나 따뜻하고 안전하기 때문에 풍전의 경우가 도드라져 보일 뿐. 풍전의 아이들은 노감독의 경질과 더불어 자신들이 사랑하는 농구 자체를 빼앗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실적을 중시하는 비정한 사회의 논리가 숨어있다. 노감독과 런앤건을 빼앗아간 것이 명확한 사람이 아니라 사회의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풍전의 아이들은 복수의 대상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다. 차라리 어떤 한 빌런이 노 감독을 린치 했거나 해고했더라면 상황은 훨씬 더 단순했을 텐데. 재단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납득할 만 논리로 노감독의 해고를 정당화한다. 팀은 성과를 내야 한다. 농구팀의 성과는 승리다. 그리고 노감독의 런앤건은 8강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감독은 교체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내재화하고 있는 효율성의 논리, 승리에 대한 맹신, 더 나아가 성공에 대한 신화가 노감독의 해고를 합리화한다.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 사람은 강렬한 복수심에 사로잡힌다. 복수심은 칼날과 같아서 복수해야 할 대상이 명료할 때조차 쥐고 있는 사람에게도 상처를 입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분노해야 할 대상이 명료하지 않을 때는 더 큰 문제가 된다. 방향성을 잃은 복수심은 오히려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들 망가뜨리고 마침내 스스로를 향하는 자기 파괴적인 결말을 예비하기 때문이다.


재단의 논리에 반박할 수 없었던 풍전의 아이들은 방향성 잃은 복수심을 대상을 가리지 않고 발산하기 시작한다. 이들의 가장 큰 패착은 재단의 논리 속에서 재단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는 것이다. 노감독에게는 승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는 사실은 망각한 채 학교에서 요구한 대로 8강 이상의 실적을 만들어내기 위해 런앤건을 사용한다. 가장 아이들다운 방식이다. 우직하고 투명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투쟁은 결국은 재단이 그려둔 프레임 내에서 작동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를 보인다.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소중한 것을 빼앗아간 대상의 정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잃은 것을 다시 찾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 그래서 지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한다. 런앤건으로 승리하는 거야. 그러면 노감독님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슬램덩크를 읽고 있는 우리는 알고 있다. 세상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노감독의 말처럼 풍전이 런앤건으로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하더라도 노감독은 언젠가는 교체됐을 것이다. 재단과 같은 사회 조직은 때때로 비합리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현실에서는 실력과 무관하게 지연이나 혈연으로 감독이 임명되기도 하고 풍전 케이스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좋은 감독이 해고되기도 한다. 바로 이 복잡한 사회의 부조리함이야말로 실제로 노감독을 그들로부터 빼앗은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풍전의 아이들은 아직 이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배운 대로 달린다. 런앤건으로 증명해 내는 거야.


그러나 실적에 쫓겨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결과로만 재단하는 평가방식은 영혼을 잠식한다. 한 번의 실패만으로도 존재에 위협이 되기에 매 순간이 위태로운 살얼음판이다. 그래서 풍전의 아이들은 코트 위에서만이 아니라 경기장 밖에서도 바짝 날이 서있다. 복수의 대상을 명료히 인지하지 못한 아이들은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적으로 간주한다. 노감독의 자리를 대체한 김영중도 자신들의 승리를 가로막는 타 팀의 선수들도. 풍전 선수들의 플레이가 거친 이유는 단지 공격적인 런앤건이라는 전술 때문만이 아니다. 풍전의 피폐함은 북산의 선수들에게도 전염된다. 싸움에 익숙한 송태섭과 강백호는 풍전의 비정상적인 공격성을 예민하게 감지한다. 경기가 아니라 폭력에 가까운 투기때문에 두 사람은 필요이상으로 흥분하고 도발에 쉽게 넘어간다. 경기는 과열된다.


단순한 승리에 대한 집념을 넘어서는 절박함이 남훈에게는 있다.


단 한 번도 지면 안돼. 왜냐하면 이건 단순한 경기가 아니니까. 이건 우리가 잃은 것을 되찾는 도박이야. 승리가 아니라 그 승리에 뒤따라오는 보상을 위해 풍전은 달린다. 런앤건에서 농구의 가장 순수한 즐거움을 찾아냈던 아이가 농구 이외의 것을 되찾기 위해 농구 그 자체를 제물로 바치는 셈이다. 이 비극을 노감독이 목격한다. 자신이 가장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을 망각한 채 재단이 원하는 방향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리고 있는 자신의 제자들을.


이기는 것보다 친구들과 함께 달리는 농구의 순수한 매순간을, 과정의 즐거움 그 자체를 사랑하던 남훈은 이제 승리에 집착하게 된다. 즐거운 농구가 더 이상 즐겁지 않게 된 순간 그는 이기기 위해 거친 플레이를 한다. 이 시점부터 남훈에게 농구는 폭력에 가까운 고통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플레이가 위협적일수록 상대팀은 위축되고 풍전은 승리에 한층 더 가까워진다. 잃은 것을 되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모든 과정을 정당화한다. 우리는 너희와 달라. 한 번이라도 지게 되면 우린 모든 걸 다 잃게 돼.


아이들을 저 지경으로 몰아넣은 풍전 재단은 우리 사회의 일면을 보여준다. 끊임없는 경쟁과 실적에 대한 압박, 승리하지 못하면 패배자로 간주하는 인식,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까지. 유독 풍전전은 이런 사회의 비정한 면모를 많이 보여주는데 학교마다 A, B, C 랭크를 매겨둔 잡지도 이 에피소드에서 등장한다. 그 안에서 즐거움이라는 순수성은 압살 당할 수밖에 없다.


에이스 킬러.

위협에도 불구하고 한치의 물러섬도 없었던 상남자 김수겸이 첫 희생자였다. 에이스의 부상으로 경기가 쉽게 풀리자 남훈은 이를 패턴화 한다. 효율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북산의 예상외의 선전에 남훈은 서태웅을 겨냥한다.


열망이 지나치게 크면 불길은 잘못된 방향으로 번지기도 한다. 남훈의 집념은 결국 그가 가장 사랑하는 농구를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타락은 처음이 어렵지 일단 스스로 정해둔 선을 한번 넘고 나면 가파른 비탈길이 시작된다. 끊임없는 추락. 있는 점수라도 지키자는 꼴사나운 짓은 안 한다는 강고한 풍전의 프라이드가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만다. 쉬운 길로 가자. 끊임없는 압박에 이미 한계치까지 지쳐있던 남훈은 유혹에 쉽게 빠져든다. 이 정도면 다시는 못 나오겠지. 그런데 서태웅은 다시 코트 위로 나타난다. 퉁퉁 부운 눈을 하고는.


남훈도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다. 김수겸도 서태웅도 자신이 여전히 알고 있는 어떤 것을, 그러니까 목표를 위해 잊은 채로 두고 싶었던 어떤 것을 끊임없이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건 농구의 순수한 즐거움에 깊이 매료된 자신의 동류들을 발견하는 경험이었다. 두려움 앞에서 물러나지 않는 용감함,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만의 기준으로 싸우길 포기하지 않는 강인함까지 모두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런앤건의 정신이다.


심각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수만 번 공을 던졌던 스스로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팀을 이끌어나가는 북산 에이스 서태웅의 플레이를 바라보며 남훈은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한다. 김수겸이 물러나지 않았을 때처럼. 세상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부당하게 한쪽 시야를 빼앗긴 서태웅이 자신과는 다르게 정도의 방식을 고수하며 그의 싸움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남훈의 합리화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 때때로 어떠한 인과도 없이 가장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가기도 한다. 송태섭은 그의 형을 바다에 잃었다. 채치수는 타인들의 오해 속에서 부당한 오명을 뒤집어썼다. 정대만은 불시에 찾아온 부상으로 그의 가장 중요한 성장 시기를 놓쳤으며 강백호는 단 한순간도 세상의 기대를 받아본 적 없는 유년시절을 보냈다. 채소연에게는 그녀가 농구를 사랑하는 만큼의 재능이 주어지지 않았고 신준섭 역시 마찬가지였다. 변덕규에게는 신장만큼의 체력이 부재했고 김수겸에게는 감독이, 유명호에게는 에이스들이 부족했다. 그리고 안한수 감독은 촉망받던 제자를 세상에 빼앗겼다.


노력하면 보상받고 진심이라고 응답받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자신만의 싸움을 이어나간다. 송태섭은 형의 부재를 그의 꿈을 통해 극복해 나간다. 채치수는 동료들을 통해 상처를 회복해 나간다. 정대만은 자신의 노력으로 부족한 훈련량을 채워나간다. 강백호는 타인들과의 관계 맺음을 통해 성장하고 채소연은 사랑의 방식을 바꿔낸다. 신준섭은 자신의 적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변덕규는 모자란 부분을 라이벌을 벤치마킹하며 채워 넣는다. 김수겸은 스스로가 감독이 되고 유명호는 에이스를 길러냈으며 안한수 감독은 새로운 선수들을 찾아내 이들을 성장시키며 스스로의 트라우마를 극복한다.


'최고의 선수란 어떤 선수라고 생각하냐. 아마 팀을 우리나라 최고로 이끄는 선수겠지.'


부조리한 시스템 속에서 고통받던 남훈은 서태웅의 투쟁을 바라보며 잊고 있던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부당한 일을 당했지만 자신과는 다른 방식으로 경기를 지속해 나가는 그를 통해 농구의 즐거움과 과정의 소중함을 기억해 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태웅이 이끌며 전진하는 북산과는 달리 자신과 함께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팀원들의 존재를 상기한다. 소중한 것을 빼앗긴 데 대한 복수심으로 자신도 타인의 재앙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태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한 발자국도 물러설 생각은 없다.'


물러서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태웅의 자세는 어딘지 런앤건을 연상시키게 한다. 풍전의 런앤건에 속공으로 맞부딪혀오는 북산의 방식도.


'그 방식이 농구를 좋아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농구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북산의 경기를 보며 남훈은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재단이 원하는 대로 승리만을 위해 달려왔다. 그런데 북산의 농구는 지금껏 자신이 해왔던 것들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팀원들의 몫까지 올인한 이 도박판에서 지게 된다면 우린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돌이킬 수 없다는 절박함이 남훈을 한계치로 몰고 간다. 다시 한번 서태웅을 향해 뛰어든 순간, 물러나지 않는 그를 통해 남훈은 깨닫는다. 너무 멀리 가기 전에 멈춰야 한다. 소중한 것을 빼앗겼다는 이유로 자신이 다른 선수에게 같은 짓을 저지르기 전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죄책감으로 얼룩지게 만들기 전에. 사람은 정말 소중한 것은 결코 쉽게 내던지지 못하는 법이다.


'농구는 좋아하나?'


머리에 부상을 입고 남훈은 오래전 자신이 농구를 시작하게 된 이유를 기억해 낸다. 유망한 에이스의 선수생명을 끝내기 전에 남훈은 제자리로 돌아온다. 친구 강동준과 노감독의 런앤건을 처음 1열에서 구경하던 그 아이로.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 감각이 돌아온다. 괴롭지 않은 농구가. 과정 자체가 즐거웠던 농구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승리를 원한다. 선수들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승리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다. 프로가 아닌 사람. 아마추어에게는 즐거움이야말로 승리보다 중요한 미덕이다. 즐거움은 승리로 향하는 과정을, 인내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어떤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의 성장을 감각할 수 있는 살아있는 경험으로 만든다. 노력이 만들어내는 가장 높은 성취가 승리라면 가장 순수한 성취는 바로 즐거움인 셈이다.


더군다나 모든 프로선수들은 완성된 채 태어나는 천재는 없다는 점에서 한때 모두 아마추어였다. 즐거움은 그래서 필연적이다. 어느 종목이든, 이기는 게 좋아서든, 상대를 누르는 쾌감이 좋아서든, 팀을 이끄는 게 좋아서든, 스스로의 성장이 좋아서든 즐거움에는 자신을 헌신하게 만드는 강력한 매력이 있다. 즐거우니까 계속하고 싶다. 즐거우니까 더 잘하고 싶다. 즐거우니까 노력한다. 이 즐거움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서는 좋은 프로 선수가 될 수 없다는 역설을  노감독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제자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즐거움을 소중히 여기길 바랐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로만 채워져있지 않다. 좋은 감독과 동료들, 그리고 열렬한 응원으로도 바로잡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부조리한 것들은 언제나 불시에 우리를 엄습한다.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호시탐탐 빼앗아갈 기회만 노리는 것처럼. 아무리 노감독 자신이 아이들을 보호하려고 해 봐도 세상 앞에서는 어림도 없을 것을 그는 안다. 불가항력으로, 정말 운이 좋지 않고서야 언젠가는 이 아이들 모두에게 한 번쯤은 가장 소중한 것들을 빼앗기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는 걸, 자신에게 세상이 그랬던 것처럼.


승리의 즐거움이 아니라 농구 자체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다는 그의 소박한 소망이 결국 좌절됐던 것처럼, 투자를 많이 했다는 이유로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프로의 실적을 요구하는 재단의 부조리함처럼, 세상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불행과 불운들이 자신의 제자들을 덮쳐올 때 그는 아이들이 이것만은 기억해 내길 바랐다. 세상은 불행만큼이나 즐거움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결과에 매몰되지 말고 과정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만 있다면 아이들을 강해질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농구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자세에 관한 것이므로. 그래서 그에게 경기 하나하나의 승패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었다.


자신이 학교에서 경질당했다고 농구를 가르치길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이들 역시 크나큰 불행이 닥쳐와도 스스로의 가장 순수한 정수를 잃지 않고 삶을 즐길 수 있는 유연한 태도를 기를 수 있기를 노감독은 바랐던 것 같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을 수야 없겠지만 세상에 대한 복수보다는 또다시 즐거움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회복하기를, 그리하여 아이들이 언제까지나 세상 속으로 망설이지 않고 힘차게 달려 나갈 수 있도록, 농구 전술이 아닌 삶의 방식으로서 런앤건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노감독이 여전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훈은 그가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멋대로 넘겨짚은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는다. 분명 부조리하고 비극적인 일임은 분명했지만 노감독은 그 사건으로 모든 것을 잃은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는 삶에 문제가 생기면 유연하게 대처하며 자신의 즐거움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강인한 사람이었다. 아마도 아이들보다 배는 오래 살아온 베테랑으로서 수많은 실패와 실망이 그를 더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사람은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남훈은 미처 알지 못했었다. 수많은 불운과 좌절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다시 일어선다. 납득하지 못하더라도 다시 즐거움을 찾아간다.


노감독이 보여준 강인함은 남훈의 시각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렸다. 노감독이 피해자가 아니라면 자신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지만 각자의 방식대로 이를 극복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농구는, 삶은 즐겁다.


경기에 복귀한 남훈은 아주 오래전 노감독이 자신들에게 알려줬던 런앤건으로 북산의 정면승부에 응답한다. 드디어 재단이 그려둔 프레임에서 벗어나서, 자기 자신도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풍전다운 경기였을 것이다.


사회의 비정함과 대척점에 있는 이 여리고 섬세한 아이들과 좋은 멘토의 에피소드를 나는 정말로 좋아한다. 슬램덩크의 안전한 세계관 속에서 유일하게 풍전전은 우리가 사랑하는 아이들이 앞으로 부딪혀야 할 어둠의 일면이 스며들어있다. 수단이 목적을 뒤집고 노력은 보상받지 못하며 가장 애정하는 것들이 더럽혀질 때도, 유혹에 빠져 때로는 옳지 않은 선택을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서로를 지지해 주던 좋은 동료도, 어쩌면 길을 알려줄 좋은 멘토도 더 이상 곁에 없을지도 모를 그 순간, 남훈은 기억해 낼 것이다. 부조리 앞에 각자의 방식대로 싸워나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무엇보다 깊은 애정으로 경기에서 승리하는 법이 아닌, 인생에서 지지 않는 방식을 알려줬던 좋은 어른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하여 결국 세상 모든 것을 적으로 돌렸던 이 섬세한 아이는 노감독이 알려준 방법대로 다시 세상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승리보다 모든 과정을 카운트하는 아마추어의 정신으로. 결과가 아닌 과정의 즐거움을 사랑하는. 가장 순수하고 순도 높은. 이것이 바로 풍전의 레거시다.


'자네의 선수들이 그렇게 약하겐 보이지 않던걸.‘

'물론이지.‘


p.s 1. 마지막 대화는 풍전이 패배한 후 노감독과 안감독이 산왕 전을 앞둔 북산의 선수들을 두고 나눈 이야기다. 나는 이 말의 주인을 서로 바꿔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상상한다. 풍전은 강하다.


이노우에가 그린 풍전전은 다른 에피소드들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그게 항상 흥미롭다. 학생들이 농구를 가까이 할 수 있는 농구 코트가 부족하다, 지원할 수 있는 재단이 없다와 같은 걱정을 하던 이노우에의 인터뷰를 전해듣다 보면 아마도 풍전전은 그가 언제나 고민하던 일본 농구의 문제적 단면의 일부를 작품을 통해 살짝 드러내 본 것은 아닌가 추측하게 된다. 슬램덩크에서 풍전은 매우 유니크한 팀이다. 마치 다른 세계관에서 튀어나온 캐릭터들 같을 정도로.


재단으로 상징되는 자본에 환원되지 않는 지극히 순수하고 아마추어적인 정신이 이 팀에 담겨있다. 모든 선수가 프로가 되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 풍전의 아이들은 시스템에서 탈주한 존재들이다. 많은 이들이 깊은 애정으로  슬램덩크의 그 이후를 상상하며 선수들이 계속해서 농구를 하길 바란다. 프로로 성장을 한다든가. 그러나 풍전을 보면 프로가 되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승리나 인정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이 세상의 어떤 것도 이들로부터 빼앗을 수 없는, 가장 순수한 즐거움과 애정이라는 점에서 언제나 이들을 응원하게 된다. 지지마라고. 그래서 김영중 감독도 결국은 울면서 풍전의 아이들을 응원했던 건 아닐까. 같은 마음일 것 같아.


‘자네의 선수들이 그렇게 약하겐 보이지 않던걸.‘


풍전은 강하다. 선수로서의 기량이나 스탯이 아니라 어떤 정신으로서. 탐욕스러운 시스템이 미처 다 집어삼킬 수 없을 만큼. 이건 농구를 넘어서는 좀 다른 이야기다. 내가 풍전전을, 그리고 풍전을 좋아하는 이유.


p.s 2. 남훈의 이름은 南烈. 미나미 츠요시. 남쪽에서 부는 맹렬한 바람이나 거센 불길을 의미한다.

노감독의 이름은 北野 기타노. 직역하면 북의 들판이다.


들판에 번진 불.


사나운 풍전의 기세를 보여주는 작명같아서 덧붙여둔다. 그리고 그걸 진정 시킨 건 流る川 루카와. 남훈이 자꾸 나가레카와라고 읽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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