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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리매트릭스 Sep 22. 2024

공황장애를 겪을 때 수렁에 빠지지 않는 팁

나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20번째 글을 채우게 되었네요. 

모두들 자신을 완벽이라는 틀에 가두어 두고 삽니다. 그건 부지런하든 게으르든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반대로 보이겠지만 중요한 건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왜 그렇게 살고 있는가? 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모르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나를 힘들게 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은 믿으면서도 그 근원이 무엇인지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스트레스의 근원은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인지하지 못함에 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외부 사건은 그저 뇌가 해석한 구실에 불과합니다.




우리자신의 삶을 어떻게든 행복함만으로 채우고 싶어 합니다. 조금의 부정적인 정서도 느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항상 즐겁고 기쁨이 넘치는 일상이 지속되기를 열망하고 또 열망합니다. 공황장애가 오면 더욱더 그런 상태가 됩니다. 이 고통이 멈추었으면 멈추었으면 하고 바라게만 됩니다. 그저 나의 외부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나를 병들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여 그 불편한 상황을 통제하려 하거나 회피하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인생은 내 맘처럼 호락호락하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현자들이 얘기하는 나를 바꿔야 세상이 바뀐다는 말은 내가 뭔가 잘못됐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라서 그런 것입니다. 나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통제권이 없습니다.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해도 일어날 일은 일어납니다.


는 신이 아닙니다.


내가 행복이라는 정서를 느낄 때 그것을 더 원할수록 불행은 빨리 찾아옵니다. 내가 불행이 찾아왔을 때 그 불쾌함에 저항하면 그 정서는 나에게 더 달라붙습니다. 그리고 그 정서는 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느끼는 감정기본적인 원리입니다.

한번 생겨난 감정은 있는 그대로 느껴주지 않고 억압하게 되면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그 머무는 장소가 바로 우리의 내면 어딘가에 있습니다. 그곳을 평소에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무의식에 한 유리병이라고 가정해 봅니다.


유리병는 어떤 감정들이 모여 있을까요?

당연히 긍정적인 감정들은 없습니다. 나는 그것들을 억압한 적이 한 번도 없을 테니까요. 행복을 저항한 적도 즐거움을 저항한 적도 기쁨을 저항한 적도 없습니다. 긍정적인 감정들은 올 때마다 내가 다 기꺼이 소진해 버립니다. 그래서  유리병 안에는 내가 그동안 느끼고 싶지 않아 억압해 둔 부정적인 정서들만이 가득 쌓여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것들이 많아지면 꿈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일상에서 화나 짜증으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는 이것들을 증상으로 느꼈던 것입니다. 두통이 오기도 하고 배가 아프기도 하고 어지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느껴지는 감정과 감각들에  저항하게 되고 유리병은 포화상태가 됩니다. 해골 스티거가 붙여진 그것들은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내가 들여다볼 수 없게 만듭니다. 당연합니다. 감정의 억압은 내가 것에 저항하도록 '위험'으로 프로그래밍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고통스러웠던 어느 시점의 나는 어떻게든 이 감정을 다시는 느끼지 않기 위해 보안의 단계를 철저히 두었습니다.  때문에 이제 와서 보려고 해도 무슨 연유로 그 안에 봉인되었는지 쉽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내가 그것을 숨겨둘 때 나조차 열어볼 수 없게 '공포'라는 파일명으로 감춰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니?


공황장애는  유리병 안에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더 이상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면서 발생합니다. 그 억압된 감정들은 나에게 제발 꺼내 달라고 울부짖습니다. 그것들은 나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숨어 지냈지만 나는 점점  그로 인해 불완전하다 느끼며 휘청이기 시작합니다. 억압된 감정들은 판단합니다. 자신들이 너무 많이 쌓여있기 때문에 내가 불행해졌다는 것을요. 그리고 나를 위해 존재를 드러내는 선택을 합니다. 


그렇다면 불행을 느끼려 하지 않았는데 왜 불행해졌을까요? 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예를 들어 행복을 위해 열심히 살았던 나를 되돌아보겠습니다.


열심히 할 때의 나는 100% 열정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그 순간 나에게도 나태라는 모습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지런한 나를 선택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나태한 나로 보이는 내 모습을 억압해 버립니다. 이런 게으름뱅이는 내가 아니야! 하면서요.

이때의 나는 '귀찮았지만 열심히 했어!' 라며 스스로를 칭찬해야 했지만 그러질 못했습니다. 난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는 사람으로 정해버렸으니까요.  난 나태하면 안 된다고 억압해 버렸기 때문에 부지런한 내 모습만 인정해 버립니다. 이것은 이후 나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최악의 기준이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배우고 양육돼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나와 부모와 이 사회가 만든 틀은 나를 엉뚱한 곳에서 열심히 살게 만들기도 하고  반대로  무기력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것은 자칫 게으름으로 비치기도 합니다. 스스로의 기준에 완벽하지 않으면 고통스러워지기 때문에 뭔가를 시도하는 것을 두렵게 만들어버린 결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게으름이 아닙니다. 게으른 나를 고통스럽게 바라보는 나의 억압된 마음입니다. 이때의 나는 조금만 잘못해도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정작 해야 할 곳이 아닌 내가 완벽할 수 있는 선택지에서는 굉장히 열심히 하고 엄한 부분에서 나를 채찍질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스스로 옥죄이고 완벽이라는 틀에 가두기 시작합니다. 사회적인 성공의 기준과 남들이 이야기하는 행복의 기준을 나의 기준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결과입니다.

결국 엉뚱한 곳에서의 열심히도 무기력으로 인한 게으름도 다 내있는 그대로 온전히 인정받거나 사랑받지 못한다는 믿음 때문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내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이 사회에서 존재의 가치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정서의 나는 철저히 외면당한 채 쌓이고 쌓여 임계점에 다다르게 됩니다. 더 이상 넣어둘 자리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싸인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어필해 보기도 합니다. 그때 내가 어떻게 했을까요? 네. 는 그것을 다시 억압했습니다. 그 싸인은 분명 불쾌한 감각으로 나타납니다. 공황장애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외부의 스트레스는 억압되어 있던 정서들을 꺼내기 위해 내가 의미부여를 했던 것입니다. 증상으로 표출되어야 하니까요. 증상은 그 억압된 감정들이 쓰는 언어일 뿐입니다.


병이 처음 주었던 공포의  순간 느낀 감각을 바라볼 때 우리는 당황하고 두려워합니다. 이건 생전 느껴보지 못한 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우린 그때 죽음을 봅니다. 심연의 공포를 봅니다. 우주에서 미아가 된듯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뇌에서는 이런 비슷한 느낌을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억압된 감정들은 결국 이런 식으로 나에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극한의 공포를 선물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좋게 부를 때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시키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직빵이니까요. 이전에 내가 붙여둔 해골 스티커(위험)를 들이미는 것입니다. 열어달라고요. 이제 그만 떼어달라고요.

이때서야 우리는 이것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우리는 그 뚜껑을 열지 못합니다. 해골 스티커는 '위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내가 그것을 의식했기 때문에 무의식은 앞으로도 크고 작은 증상으로 계속 사인을 보냅니다. 이것이 우리가 겪고 있는 공황장애의 실체입니다.


무의식 안에 있던 억압된 수많은 감정들은 계속해서 나에게 문을 두드립니다. 이것은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환우가 아닌 사람들은  이 상태를 화가 났다. 짜증 났다. 수치스럽다. 등등으로 느끼게 됩니다. 어차피 무의식 안에 있는 정서들이 만들어내는 감정들은 저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베이스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해골 스티커의 위엄입니다. 이것은 지난 일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현재의 나도 부정적인 감정들을 억압하며 계속 그 속으로 밀어 넣고 있습니다. 나는 사회적인 기준과 타인의 기준에 부합한 긍정적인 나의 모습만을 인정하며 그것이 나의 100%인 것처럼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부지런해야 돼.

용감해야 돼.

의연해야 돼.

착해야 돼.

성공해야 돼.

사랑해야 돼.

.

.

.


이것들은 내가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이라는 반증인데도 쉽게 깨닫지 못합니다. 나는 그래서 불행했던 것입니다. 행복하려면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완벽함을 꿈꾸며 사고는 반대로 하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이제 억압되어 있는 나의 부정적인 정서들을 만나야 합니다. 만나게 되면


귀찮지만 해냈어.(부지런하구나.)

두렵지만 이겨냈어.(용감하구나)

슬프지만 잘 견뎠어.(의연하구나.)

내가 갖고 싶었지만 친구를 위해 양보했어.(착하구나.)

무능력하지만 최선을 다했어.(성공이야.)

미울 때도 있지만 사랑해.(사랑한다.)

.

.

.


이렇게 됩니다. 나는 완벽할 필요가 전혀 없던 것입니다. 인간이니까요. 긍정적이라는 것은 항상 그 반대에 부정적인 것이 있어야만 성립된다는 것을 잊고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리도 힘들었던 것입니다. 이제 병에 있는 해골 스티커를 떼어 주세요.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완결무결하지도 완벽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 일련의 이야기는 제가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성경에도 불경에도 다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관련된 서적이나 콘텐츠도 넘쳐납니다. 명상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접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심리학에도 나와 있는 것으로 압니다. 요즘은 내면아이 치유, 무의식 정화 등으로 불리며 많은 분들이 하고 계시기도 합니다. 저는 이 병이 나아가는 일련의 과정에서 극히 일부를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증상이나 두려움의 실체가 내가 나에게 보내는 신호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이 병의 반은 해결된 것입니다. 더 이상 공포로 해석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죠. 이 병으로 인해 삶을 통제하던 방식에서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완치자들이 지나온 길이며 비결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병이 주는 증상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이라도 바뀌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래봅니다.


PS.  며칠 전에 인사이드 아웃 1, 2를 봤습니다. 너무 놀랐습니다. 제가 깨달은 것이 영화 전반에 그대로 재현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쁨 이가 하는 모든 선택이 우리가 평소에 하는 것입니다. 긍정만을 추구하고 부정을 억압하는 삶이죠. 우리는 완벽할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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