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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브메 Feb 20. 2022

결국, 퇴사하지 않기로 했다

3년차라서 드는 고민들

인문 잡지 한편 5, <일>


일이란 무엇인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행위, 고통스러운 노역, 생계유지 수단, 자아실현의 장,
성인으로서 사회적 역할의 수행이자 인정 획득 방식, 혹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과정.

그 모두를 우리는 '일'이라 부른다.

일을 둘러싼 다양한 의미와 경험은
일하는 사람을 소모시키거나 고양시키면서
이전과는 다르게 바꾸어버린다.

- 인문 잡지 한편 5, <일>


 일에 지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효능감을 잃는 일'에 지쳤었다. 일을 하다 보면 가끔은 상사를 설득하지 못할 때도, 내 뜻대로 일이 굴러가지 않을 때도 있다. 안다. 그 정도는 이해하고 감내할 수 있는 연차였다. 그런데 그 날따라 내 시간이 내 시간같지 않았다.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더 나은 결과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대개 그래왔고, 대개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시작한 프로젝트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나만의 과제이면 좋을텐데, 나만의 과제가 아니었다.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도중에 포기할 수도 없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이 합치되지도, 동의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 그게 나를 미치도록 지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꽤나 충동적으로 이직 준비를 실행에 옮겼다.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불규칙적인 야근, 상사의 말 한마디에 요동치는 내 스케줄, 그리고 더 이상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만 같은 불안감으로부터.


 일사천리로 서류를 지원했고, 4시간이나 면접을 봤고, 합격했다. 단 2주만에 모든 게 결정됐다. 연봉도 1,000만원 가량 뛰었다. 성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던, 미래가 그려지는 젊고 유능한 팀이었다.


 하지만 결국, 오랜 고민 끝에 이직하기 않기로 했다. 지금의 회사를 퇴사하지 않기로 했다.



만약 그 곳에서도 똑같은 문제에 맞닥뜨린다면?


 적어도 입사 지원서를 넣고, 면접을 보던 그 때 만큼은 새로운 시작을 그렸다. 그러면 내 역량이 더 빛나리라 생각했고, 내가 겪고 있는 번아웃도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 곳에서도 똑같은 문제에 맞닥뜨린다면, 그 때 가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때 그 상황을 극복하는 법을 배웠어야 했는데, 라며 후회하지 않을까?


 '후회'의 관점에서 바라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되었다. 알게 모르게 이곳에서 성장하고 있던 나 자신과 너무나 당연하게 주변에 계셨던 '좋은' 팀원님들. 조직적으로 협업할 수 있는 인프라와 배울 점이 많은 사람들. 그리고 이 모든것들을 활용해 실현시킬 수 있는 나의 꿈이.


야근메이트였던 팀원님이 남겨준 '내 트리를 꾸며줘!'


 나는 빵 뜨는 광고를 만들고 싶어서 이 회사에 지원했었다. 배달의민족이나, 지그재그나, 시몬스같은. 그런데 아직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걸 위해 너무나 힘든 인턴 시기를 거쳐 그보다 더 힘들었던 1년차, 2년차를 보냈고 이제야 내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해낼 시기가 온 것 같은데, 지금 바로 NEXT STEP으로 넘어가기에는 아쉬움이 남고 마는 것이다.


 경제에서는 매몰비용은 생각하는 게 아니라지만, 커리어에서는 어쩔 수 없이 '꿈의 매몰비용'을 생각치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적어도 나는 무언가를 이루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사람이니까. "그 때 적어도 이건 해냈었지"라는 위안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새로운 회사에서도 빵 뜨는 광고? 만들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몰입하는 환경이 주어져 더 잘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광고라는 일을 하는 이상, 업이 바뀌지 않는 이상 이 분야에서 해낼 수 있는 데까지 해내고 다음 스텝을 밟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이 회사를 첫 회사로 선택한 이상 '빵 뜨는 광고' 근처에라도 가봐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상황적인 괴로움은 내가 이 꿈을 포기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재작년도 힘들었고 작년도 힘들었고 아마 올해도 힘들 것이다. 곧 PT로 바쁜 시기가 들이닥칠 것이고 나는 새벽까지 일하거나 주말 출근을 하며 갈려나갈 것이다. 그치만 다른 업을 찾아 볼 수 있는 권리, 환경적 이유의 퇴사라는 선택을 지금은 미루려고 한다. 조금만 더 기꺼이 고생해보련다.


 언젠가 이 일도 끝나고, 이 회사와 나의 관계가 끝날 때도 오겠지.
그게 지금은 아닐 뿐이고.



마지막으로, 또 다시 다짐한다. "자발적 노예는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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