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수업을 들어서 서로 얼굴만 알고 지내는 여학생이 있다. 그 학생의 목소리는 유독 카랑카랑한,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목소리여서 별나게 사람 얼굴 기억 못하는 나도 쉽게 얼굴을 익혔다. 목소리 때문에 안 그래도 별로 좋지 않은 인상이었는데 더 안 좋은 인상을 심어준 계기가 한 번 더 있었다.
어느 날인가 수업 기다리느라 복도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그 학생이 통화를 하면서 옆 의자에 앉았다. 그냥 멍하니 앉아있던 참이어서 그 학생의 통화내용을 별 생각없이 듣게 됐었는데 상대방은 휴대폰 대리점 직원인 것 같았고 그 학생은 휴대폰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는 모양이었다. 근데 가만 듣다보니 그 학생이 말하는 싸가지가 가관이었다.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더니, 나중에는 중간중간 쌍욕을 섞어가면서 그쪽이 나를 화나게 만들었지 않냐, 이게 지금 몇 번째냐, 영업을 이따위로 할거냐 하는 식이었다. 속으로 '어우 쟤 진짜 싫다, 저 말하는 싸가지!'하고 속으로 짜증을 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보건실 출근해서 책 읽고 있는데 그 여학생이 들어왔다. 보건실에 많이 왔었는지 선생님과 그 학생은 서로 알은체를 했고 몇 마디 대화도 나눴다. 난 옆에서 인상 찌푸리면서 가만히 있다가 학생이 나가고 나서 선생님께 여쭤봤다. 저 학생 아시냐, 나랑 같은 수업 듣는데 싸가지가 가관이다라고. 그랬더니 선생님이 안다고 하면서 자살기도를 자주해서 보건실에 자주 실려 왔었다고 했다. 선생님이 들은 바로는 가정사가 복잡하고 문제가 좀 있는 것 같다고. 그러면서 겉으로는 좀 세 보여도 속은 속이 아닐거다, 저 나름대로 살아보려고 저렇게 된 것 같다 하셨다.
그 얘길 듣고 뒤통수를 세게 퍽 맞은 느낌이었다. 아 그렇구나.
강하기 때문에 뒤틀린 사람이 있고, 오랜 결핍에 시달려 뒤틀려버린 사람이 있다. 살다보면 세상엔 생각보다 후자의 경우가 더 많다는 걸 알게 된다. 어릴 때 부모님이 가정사나 주위환경이 좋지 않은 친구와 어울리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 친구들은 '뒤틀려버리기' 쉬우니까.
나는 지금까지 줄곧 나 자신이 삐딱선 타지 않고 자란 것에 대한 나름의 자부심과 의기양양함이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부모님께 유세할 수 있다는 것. 언젠가 아빠와도 진지한 얘기를 나누게 되면 '어릴 때 내가 술담배 안 배웠다는 게 대견하지 않냐'하는 식으로 으스댈 심산도 있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니 사람살이가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쯤은 이제 나도 제법 안다. 행복에 겨워 사는 사람은 거의 없고, 누구나 다 발버둥 치면서 살고 있다는 것도 안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영화엔 '부모 때문에 상처 받지 않는 영혼이 어딨겠냐'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래, 이것도 알고 있다. 이렇게 알 거 다 알면서도 힘들다고 우는소리 내는 나는 정말로 어린걸까. 아직도 철부지인건가. 언젠가 윤희가 철부지의 뜻은 철을 모른다는 의미라고 알려준 적이 있다. 아닐 부, 알 지.
사실은 뭣도 모르면서 다 아는 척하고, 조금이라도 상처 받으면 어디 가서 확 죽어버리자는 생각이나 하는 나는 정말로 어리광 부리는 어린애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철이 언제 들는지도 모르고 언제쯤에야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큰 그릇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지만 계속 갈고 닦아보기로 한다.
언젠간 사계를 함께 가진, 높은 산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