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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대리 Feb 20. 2024

다낭성 난소 증후군을 아시나요?

다낭성 난소 증후군 질환자의 이야기 

24살, 공공기관 인턴직에 합격을 했다. 


졸업과 동시에 4개월 만에 이뤄낸 나름의 '쾌거'였다. 면접 때, 나 자신을 표현해 보라는 즉흥적인 질문에 나는 얼굴이 빨개지는 것도 꾹 참고 과일에 비유를 하며 나 자신을 어필했고 심사위원의 웃음은 합격인지 불합격인지 나를 막막하게 했지만 결국 '합격'의 열쇠를 거머쥐게 했다. 비록 인턴이었지만 그 시기에 지방대생에게 공공기관 인턴은 참으로 귀하고 귀했던 기회였다. 그리고 후에 무기계약직 전환에 대한 기회도 있었더랬다. 



그렇게 공공기관에 입사하고 내가 배정받은 팀은 바로 시스템 팀이었다. 말이 좋아서 시스템 팀이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각종 민원을 응대하고, 출장을 잦은 그야말로 CS를 위해서 만들어진 특별팀에 배정이 되었다. 당시 나와 6살 차이가 나는 언니 그리고 오빠들과 같은 팀에 배정이 되었는데 두 사람 모두 1일 근무를 하고 모두 그만두었다. 그렇게 혼자 남아서 기관 시스템을 사용하는 사용자들에 대한 민원을 건 수로 해결을 해야 했고 법률 지침서를 외우며 벌금을 매기거나 부당함을 토로하는 민원인도 상대를 해야 했다. 


심지어 퇴근 후에는 술을 좋아하는 과장, 부장님들의 등쌀에 밀려 거의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토하 고를 반복하며 찐 사회인으로서 생활에 녹아들었다.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수화기 너머로 억울함을 표하는 사람 대신에 그 하루의 온갖 악감정을 전화 한 통에 마치 '오늘 너 잘 걸렸다' 싶은 마음으로 쏟아내는 사람이 정말 많다는 것을. 인턴이 할 수 있는 일은 대리, 과장, 부장급과 똑같이 '죄송합니다'를 연신 반복하거나 정규직이 받지 않는 민원인을 응대하는 것이 전부였다. 어느 순간 전화만 울리면 토할 것 같았다. 가족, 연인, 친구와의 전화도 너무 싫었다. 심지어 전화를 받기 싫어서 코드를 잠시 내려놓은 적도 있었다. 걸걸한 민원인의 전화를 받으면 언제 욕이 터져 나올지 몰라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새었고, 욕설을 듣고 있노라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렇게 인턴 종료기간이 다가오자 더 서러운 것은 나에게 엄마 같던 과장님께서 내 책상을 치우라며 한 달 전부터 자리 정리를 요청하고, 회식 자리에서 나는 다시 철저히 배재가 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콜 업무는 나에게 압박처럼 '오늘 몇 건 했어?' 라며 물어보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무기계약직 전환을 고사했다. 



계약 종료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 몸이 이상해서 가까운 병원에 연차를 쓰고 방문했다. 모두 임산부에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들이 가득한 산부인과에 정장 치마를 입고 온 어린애가 앉아서 대기를 하니 사람들의 시선은 따가웠고 호기심에 어렸고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듯 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수치심을 줄 법한 의자는 어떻고, 처음으로 초음파 검사를 했던 그 차가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름 인고의 시간(?) 동안 진료를 마치고 멋쩍어하는 나에게 의사 선생님은 '무슨 일을 하세요?' '몇 살이에요?'와 같은 호구 조사를 하셨다. 그리고 긴 대답 끝에 '다낭성 증후군이에요. 완치되는 병 그런 거 아니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2030 직장인 여성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에요.' 그게 무슨 병인지 질환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초음파 상으로 의학 지식이 없는 내가 보아도 내 난소는 많이 아파 보였다. 




그렇게 처음으로 처방을 받은 피임약을 복용하면서 그제야 나의 몸이 많이 안 좋다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2년 휴식과 공무원 준비를 하면서 나름의 회복기를 거쳤고 무려 4년 간의 약복용과 병원 진료 끝에 지금은 정상범주에 가깝게 컨디션을 찾고 약 복용을 중단하였다. 당시, 나의 피임약 복용 사실을 알게 되신 부모님에게 몇 날 며칠을 다낭성 난소 증후군을 설명하며 결코 내가 죽을병이나 방탕한(?) 이유로 약을 복용하는 사실이 아님을 설명하며 함께 대학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이제는 약복용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정상' 판정을 받고서야 나는 부모님이 가진 '오해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퇴사를 한다는 후임을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건강'으로 향했다. 그리고 몸이 아프다던 후임은 나에게 '다낭성 난소 증후군 판정을 받았어요' 라며 자신의 몸상태에 대한 운을 떼었다. 남일 같지가 않았다. 후임을 격려해 주고, 괜찮을 거라며 나의 경험담도 이야기해 주었지만 후임은 이미 퇴사를 결정한 것만으로도 건강을 위한 첫걸음으로 마음을 비우고 여유를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심지어 장기적인 휴식을 가질 계획도 갖고 있었다. 부모님도, 남자친구도, 모두 걱정해 주는 마음을 알기에 더 건강해지기 위해 노력한다고도 했다. 


출처 : 해피문데이




생각보다 많은 여성들이 다낭성 난소 증후군을 갖고 있다. 


말을 하지 않아서 그리고 공유되지 않은 이야기라서 아직도 많이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신기하게도 내 주변의 10년 지기 대학교 친구들 역시도 이 증후군을 가지며 살아왔고 지금은 시험관, 난임 치료를 병행하면서 지금은 아이의 엄마로서 삶을 일궈나가고 있다. 


여자로서 참 속상한 질환 중에 하나다. 24살에 첫 진료 후, 나에게 '임신을 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라고 진단을 했던 의사 선생님이 참 야속했지만 찰나의 가능성을 말해준 선생님의 진단을 나는 아직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마치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사람처럼 정보가 거의 없어서 그리고 공유할 사람이 없어서 힘들고 무서웠다. 


모든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이다. 그리고 늘 다낭성 난소 증후군의 치료법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이라고 의사들은 말한다. 스트레스를 어떻게 하면 안 받을 수 있는 걸까? 나는 아직도 의문이다. 정상 범주로 들어왔지만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질환을 옆에 두고 살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 모두 건강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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