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제안서를 씁니다
내가 태어나던 90년대만 하더라도 '벤처붐'으로
패가망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업 초기 비용도 많이 들어가고, 유지를 하는 비용도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마치 복권에 당첨되는 일처럼 대박을 터뜨리는 벤처는 아주 극히 드물었다. 겨우겨우 연명을 하거나 망하게 되면 끝도 없이 망해 가족들의 생계까지 위협하는 그런 이미지로 국내에서는 자리를 잡았던 것 같다. 그래서 늘 대한민국의 드라마 속에서 '사업을 하다가' 망한 사람들은 노숙자 혹은 집안의 한 가장으로 어깨 한 번 펴보지 못하고 자식과 아내 눈치를 보는 인물로 그려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제2의 벤처붐이다.
너도 나도 이제는 1인 창업가의 시대도 도래하였고, 심지어 퍼스널브랜딩을 통해 SNS로 제2의 캐릭터를 가지고 자신의 사업성을 펼쳐가는 사람들도 많다. 거의 10명 중에 3명은 자신만의 입지를 SNS 세상에서 N잡러 혹은 부캐로 나아가는 세상이다. 물론 매스컴에서도 이러한 창업의 분위기를 청춘, 열정, 도전의 아이콘으로의 브랜딩을 잘 그려내는 점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이런 다양한 창업의 세상 속에서 나는 벤처기업들이 이 벤처 생태계에서 잘 성장하고 투자도 잘 받고 계속해서 한국의 '애플' '아마존' '구글'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계절적인 특색을 떠나서 봄이 오면 '제안서를 쓰는 달' 이기 때문이다.
국가적으로 연초에 각 부처에 배당된 예산을 다시금 쪼개어 사업 공고를 내는데 이 시기에는 모든 기업들이 이 지원금과 지원사업에 선정되기 위해서 우리를 뽑아달라는 '제안서'를 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 시기에는 약속을 잘 잡지 않는다. 늘 대비를 해도 야근은 피할 수 없고, 잔업은 선택이 아닌 필수인 시기이다. 이 시기에 잘 나가는 액셀러레이터 기관에서도 정부 지원이라는 메리트 있는 사업 영역을 놓칠 수 없기에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좋은 비즈니스 모델 (수익모델)을 가진 액셀러레이터 기관이라 하더라도 좋은 사업들에는 제안서를 쓸 수밖에 없다. 더더군다나 이런 지원사업만을 노리는 기관들도 여럿이기에 늘 경쟁률은 치열할 수밖에 없다.
연초에 제안서를 목표로 우리 회사의 포지셔닝과 프로그램에 대한 방향성도 잡히게 되는 이점이 있다.
물론 대부분의 제안서들이 예전에 쓰던 내용들의 '복사 + 붙여 넣기'이며 방향성을 고민하고 연구할 만큼 시간이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시간 내에 계획적으로 쓰더라도 발표자(대표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제출 직전에도 엎어지고 새롭게 쓰는 것이 제안서다.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이제는 '복사+붙여 넣기'에 달인이 되는 것 같다. 마치 글을 쓰고 있지만 내 영혼은 저 멀리, 내 손만 키보드에 아무런 감각 없이 움직이는 기기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실제로 나는 여러 액셀러레이터 회사에 소속되면서 제안서를 쓰는 순간마다 '진심'으로 벤처기업을 위해서 프로그램을 고민하고 연구하는 곳은 정말 손에 꼽는다고 생각이 된다. 늘 '다다익선' 10개 넣어서 1개만 되면 좋겠다는 식의 운영방향이 대부분인지라 나 역시도 액셀러레이터로서의 자질과 본질을 의심케 된다. 물론, 추후에 선정이 되면 예산과 프로그램의 세부적인 사항들은 조율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단은 선정된다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다.
액셀러레이터도 밥벌이를 위해서 밥벌이를 찾아다닌답니다.
항상 갈구하라
바보짓을 두려워마라
- 스티브 잡스